72 하이델베르그 3 고성과 포도주통
72 하이델베르그 3 고성과 포도주통
유럽의 다른 성들 하고는 조금 다르게 성 주위로 20m 깊이의 해자를 파 놓아 성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성으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문이 1615년에 프리드리히 5세가 영국인 아내인 엘리자베스 슈트어트의 생일 선물로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엘리자베스문(Elizabethentor)이다.
글쎄…. Lego Block처럼 다른 곳에서 아내 몰래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옮겨와서 쌓았다면 말이야 되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랑의 선물인 것만은 틀림없이 아름다운 조각들로 치장된 문이기에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이 문에서 사진 찍고 지나간다.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도 있으니까….
이 문 한쪽에는 먼 후일, 괴테의 시 한구절이 새겨져 있다는데, 독일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괴테가 하이델베르그에서 55세 연하의 18세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1804~1899)와 열애를 하던 때에 쓴 싯귀가 아닐까 생각 키운다.
오죽하면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마저 괴테와 사귀었던 여인들도 같이 연구해야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던 대 문호이다 보니 많은 이야기거리가 만들어지며 또 그의 시나 소설, 희곡 속에 심겨 졌겠지.
괴테와 울리케가 열애를 할 때 울리케의 양친은 괴테의 만남을 만류했지만 울리케는 그의 부모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류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 울리케는 인류역사에 영원히 이름이 남으리라”며 부모님들의 만류를 뿌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있단다.
결국 괴테 아들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단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노라 (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
당찬 소녀 울리케, 혹시 “파우스트 2부”에 나오는 “그레트헨”의 극중 모델이 아니었을까? ㅎㅎㅎ(괴테 연구자들은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다고들 한다. 파우스트는 독일의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강의하였던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1480년?~1541년?) 박사가 모델이였다는 말도 있으니까. 또한 괴테가 1832년 임종하기 직전까지 계속 수정 보완하였다고 하니 이 시기는 그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울리케와 열애를 이루지 못한 몇 년 후인 셈이다.)
아무튼 하룻밤 사이에 아름다운 문을 만들어서 부인을 행복하게 해 준 프리드리히 5세의 사랑과, 괴테의 나이를 초월한 사랑이 있었던 낭만적인 사랑의 고성이니 포도주 또한 풍부하였었겠지.
당시 선제후였던 프레드리히 4세가 1583-1610에 지은 본관 건물을 간단히 “프레드리히 관”이라고 부르는데, 1890년에 오랜 논쟁 끝에 화재에 피해를 입은 부분만 재건되었다.
이 건물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로를 따라 건물 아래로 들어가면 커다란 포도주 통이 보이며 자그마한 Bar가 있어 포도주 시음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 포도주 통은 작은 포도주 통이고, 조금 더 들어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크기의 포도주 통이 탄성을 지르게 만든다.
1751년 선제 후 카를테오도어 때 제작된 이 술통은 지름이 약 7미터이며 누워있는 길이가 8.5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술통으로 약 221,726리터의 술을 보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하실을 꽉 채우고 있다.
비좁은 계단을 통해 이 통 위로 올라가면 운동장 같은 마루가 나와 그 크기를 짐작하게 하여 준다. 다시 좁은 계단을 돌아 내려오면 거대한 술통의 맞은 편에 페르케오의 목상이 서 있다. 이 술통을 만든 페르케오는 하루에 18리터의 포도주를 15년 동안이나 마신 유명한 대주가로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단다.
그는 80세까지 장수하였으나 의사가 건강을 위해 술을 끊어야 한다고 하자 바로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니 그는 과연 “바카스”의 반열에 들지 않겠는가!.
도주를 한잔씩 마시고 나와 성 뒤로 돌아가면 아름다운 하이델베르그 시내정경이 활짝 펴진다.
네카어(Nekar)강의 카를데오도어 다리 건너로 보이는 길이 괴테가 사랑하며, 사색하며 거닐던 “철학자의 길”이라고 설명한 후 뒤 돌아서서 돌에 파인 발자국을 보여주며 설을 늘어 놓는다.
이 발자국은 “예전에 왕이 전쟁터에 나 갔을 떼 왕비가 바람이 났단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급하게 성으로 돌아오는데 불륜남은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급한 나머지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는데... 그때 생긴 발자국” 이란다.
역시 사랑하기에 참 좋은 하이델베르그인 모양이다. ㅎㅎㅎ
성 뒤로 돌들로 잘 포장이 된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 성령교회가 있는 광장이 나온다.
30년전쟁(1632) 때 도시가 폐허가 되었고, 1693년에는 프랑스의 침략으로 거의 다 파괴되었지만 아직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은 성령교회(1400~36)는 하이델베르그에 남은 몇 안되는 중세시대의 고적이지만 여기에 도착할 즈음에는 저녁시간도 지나 모두가 지치고 허기지기에 거저 뒷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식당으로 가기를 재촉하는 일정이 되고 말았다.
허기지고 피곤하며 배마저 고프니 그 많은 사랑 이야기도 결국은 남의 사랑타령이 되고 만 하이델베르그였다.
하룻밤 새 “만들었다”와 “축조했다” 라는 단어 중 어느 것이 맞을까?
1890년에 오랜 논쟁 끝에 화재에 피해를 입은 부분만 재건되었다.
1751년 선제 후 카를테오도어 때 제작된 세계에서 제일 큰 포도주 통.
술통 위가 이렇게 넓다.
술통을 만든 페르케오의 목상
뒷 마당에서 보이는 하이델베르그 시.
하이델베르그대학 뒤로 보이는 다리 건너가 “철학자의 길”이란다.
글쎄…철학자 보다는 “시인의 길” 아님 “사랑의 길”이 좀 더 어울릴텐데…
그 당시는 정조대의 유행이 지난 후였기에 이런 발자국이 만들어 졌나보다. ㅎㅎㅎ
성 뒤 소로로 내려 가다가 “남겨 놓고 온 사랑”을 뒤 돌아보는 옛날의 소녀들
성령교회의 뒷 모습
[김성종] [5:54 PM]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7iP8ubVJHSw
[김성종] [5:54 PM] https://m.youtube.com/watch?v=J0NWtEeZuWM&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