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리3 강화도 3 광성보(廣城堡)
대가리3 강화도 3 광성보(廣城堡)
효종 9년(1658)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1679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었다.
(지난 호에 이어) 덕진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는 광성보를 수륙 양면으로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현대화 된 미군의 함포사격과 덕진진으로부터 올라 온 해병대의 배후 협공으로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도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기에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 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결국 퇴각이 아닌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일이 신미양요인 것이며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신미양요때의 처절한 전투로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 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장렬하게 전사한 무명용사들에 대한 광성제가 봉행된다.
이 광성보에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곽들이 잘 보수되어 있어 구지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가족들이 나들이 하며 자녀들에게 안내판에 쓰여진 설명문만 읽게 하더라도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견학을 하고 있었다.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쌍충비 신미양요 때 미국에 맞서 싸운 어재연, 어재순장군의 업적을 기린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