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chunchunhi 2017. 1. 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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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19 Hoover Dam

 

후버 댐은 미국경제의 침체기에 태어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 자체가 미국의 능력을 전 세계에 증명한 증거이다. 건설 당시의 비용이 4,900만 달라가 들었다니 오늘의 가치로 환산하면….?

2015 12 1일에 영국 텔레그래프가 현대사에 완공된 가장 불가사의한 건축물 20을 꼽을 때 6번째에 들어 가도록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후버 댐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구조물로 손꼽히고 있다.

수천 명의 일꾼들과 그 가족들이 후버 댐이 있는 블랙 캐년에 들어와 콜로라도강과 싸우며  척박하고 황량한 땅에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을 만드는데 족히 5년의 세월이 걸렸다.

아치식과 중력식을 겸한 구조로 높이는 221.3m이고, 하부폭 201.2m 이며, 자동차가 다니도록 만들어 진 상부의 길이는 379.2m이다.

발전용량은 1,345㎿이며, 저수량은 34.85억만㎥이나 되어 이 또한 그 당시로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진 세계 최대의 호수인 미드 호가 생겼는데 댐은 홍수 조절, 수력발전, 관개, 식수, 산업용수 공급에 큰 역할을 하며 미국의 서부 생활환경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1936년에 완공되어 불더 댐으로 불리우다 1947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기념하여 후버 댐으로 재명명되었다.

이 댐이 유독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그 규모와 더불어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으로 배웠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인 세 명중 한 명이 실업자가 된 대공황 시기, 일자리 창출과 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의 대표 주자로써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후버 댐 (Hoover Dam) 은 오늘날의 경제 상황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이름 중에 하나이다. 허나 뉴딜 정책의 상징이라면 루즈벨트 댐이 더 걸맞은 이름이 아닐까?  

왜 뉴딜 세력의 비난의 표적이 된 후버의 이름이 뉴딜 정책의 상징물이 된 이 거대한 댐의 이름으로 선택되었을까?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풀어 보며 이 댐을 둘러 보기로 하자. 이 또한 재미가 아니겠는가!

 

1931 3월 마침내 오랜 준비가 끝나고 불더 댐이 역사적인 착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인 후버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이 상무부 장관 시절부터 공을 들인 이 댐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후버 댐이라는 명칭을 붙였었다.

이 댐을 건설하는 동안 콜로라도 강의 물을 우회시키기 위해 17m 지름의 4개의 거대한 우회로가 건설되었으며 또 건설을 돕기 위해 라스베거스까지 50km 의 철도까지 건설하고, 건설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인근에 불더 시티 (Boulder City) 라는 위성도시까지 건설할 예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회사에서 이 건설을 모두 하기는 불가능하였기에 6개 회사가 협력해서 이 거대한 토목 공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상황은 후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29년 이후 발생한 대공황은 1930년에는 다소 회복되는 듯 하였으나 다시 미국 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주가 수준은 결과적으로 10분의 1로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인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후버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국민들도 후버를 싫어했다. 결국 후버는 재선에 실패하고 1933년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을 내세우면서 집권하게 된다.

흔히 뉴딜 정책하면 토목 공사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복잡하게 여러가지 정부의 경기 부양 및 저 소득층 지원 계획을 포함한 것이었다.

물론 대규모 토목 공사가 그 큰 축을 담당하며 뉴딜 세력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지만

뉴딜 세력이 집권하기 전부터 건설되고 있었던 후버 댐은 공사 규모가 워낙 클 뿐 아니라 암반이 단단해서 진행이 더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짐에 따라 후버 댐 건설 계획은 일정이 매우 빨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정이 당겨지다 보니 당시 5000 명이 넘는 노동자를 갑자기 고용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사막에 세워진 천막에서 생활해야 했다. 불더 시티가 완성될 때까지 말이다.

대공황 시기에 이 댐 건설은 수만개의 연계된 일자리를 제공했다. 물론 1,5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서부 일대의 개발을 가져온 점에서 이 건설은 미국의 대역사였다. 그래서 인지 1985년 미국 정부는 이 댐을 National Historic Landmark 로 지정하였다.

결국 이 댐은 뉴딜 정책으로 인해 2년 정도 앞당겨진 1936년에 완공되며, 개관식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며 당시 인기 없는 전임 대통령의 이름 후버에서 이 지역 이름인 불더 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작 댐의 실제 건설 위치인 블랙 캐넌의 이름은 한번도 공식적인 댐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사실 후버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 불더 댐만은 자신들의 공적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댐과는 별 연관이 없던 루즈벨트 정부가 자신들의 정책인 뉴딜 정책과 같이 홍보를 하면서 이름까지 바꾼 것이었다. 당연히 억울함을 호소할 만했지만 당시 대공황에 책임이 있던 후버 정권에서는 그냥 침묵만 지킬 수 밖에 없었다.

1947년 루즈벨트 정권이 끝나고 난 이후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이 댐의 이름을 다시 후버 댐으로 바꾸는데 찬성한 것이다. 그 이후 이 댐은 뉴딜 정책의 상징이면서 이름은 후버 댐인 기묘한 동거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출처] “후버댐, 그 비하인드 스토리|작성자 고든에서 발췌,

 

 오래 전에 후버 댐을 다녀온 분들은 최근에 많이 달라진 주변 풍경으로 새로운 후버 댐을 보는듯한데, 그 하나가 Black Canyon을 이어주는 Bypass Bridge 2010년에 완공된 것이다.




Black Canyon 이어주는 Bypass Bridge 2010 완공











댐으로 인해 생겨난 미드호.

주변의 암석을 고르는 작업이 가장 위험하였단다. 작업 당시 모습


아치식과 중력식을 겸한 구조로 자동차길이 상부의 길이는 379.2m이다.



발전량 1,345, 저수량 35억㎥이나 되어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가 됐다. 댐은 홍수 조절, 수력발전, 관개, 식수, 산업용수 공급에 역할을 하며 미국의 서부 생활환경을 대폭  바꾸어 놓았다. 1936년에 완공되어 “보울더 댐”으로 불리우다 1947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기념하여 후버 댐으로 재명명되었다. 하늘에서 후버 (빌려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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