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chunchunhi 2014. 12. 5. 09:01

75 교황 자오선

 

포르트갈은 주앙1(재위 1385∼1433) 때부터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하여 왕권의 기초를 다진 후 외부로 눈을 돌려 영국과 동맹을 맺으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항해왕(航海王)이라고 불리는 주앙 1세의 아들 엔리케는 여러 탐험가들을 후원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비롯한 신항로를 개척하던 중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열며, 브라질을 발견함으로써 포르투갈을 해양왕국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이보다 조금 일찍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은 이 두 나라가 더욱 혈안이 되어 신대륙 찾기 경쟁을 하는, 그야말로 세계사를 흔들어 놓는 역사가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던 콜럼버스의 공적은 스페인 (당시의 에스파냐)으로 돌아가고, 브라질과 인도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의 공적은  포르트갈 갖게 되어 신대륙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니까.

 

기독교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트갈은 선교사를 앞세워  신대륙에 정착을 하는 반면에 군인들이 뒤를 이어 조금씩 조금씩 그네들의 땅을 점령하게 된다.

Mission이라는 영화에서도 리얼하게 잘 표현이 되었지만 이네들의 말 대로 "당신네들은 하늘나라의 땅을 약속하고는 우리들이 살아오던  이 땅을 다 빼앗아 갔다!"


오늘날꽁키스따도르(스페인어: conquistador)’라고 불리는 당시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을 광범위하게 침략하면서 페루의 잉카 제국과 멕시코의 아스텍 왕국들에서 황금 등 각종 재물을 약탈하는 동시에 원주민들의 대량 학살을 통해 잉카 문명과 아스텍 문명 등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 문명들을 말살하였다.

땅을 넓히려는 야욕은 스페인이나 포르트갈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필연적으로 영토분쟁이 일어나 서로가 뺏고 뺏기는 전쟁이 심하여 지자, 양국 간의 지나친 다툼을 우려한 교황의 중재로 1차로 1493 5월에 아프리카 서쪽  카보베르데 섬에서 서쪽으로 100리그(480km) 떨어 점에서부터 남북으로 잇는 경계선을 그어  (서경 38도선)  일종의 휴전선이 그어 졌었으나 포르트갈의 불만으로 1 뒤인 1494 6 7, 스페인의 작은 마을인 토르데시야스에서 다시 서쪽으로270리그를 옮겨 3720리그점인  서경 46 37분에 다시 그어지는 조정안이 마련되었다. 바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 1494.6.7) 것이다. 이때만 하여도 포르트갈의 국력이 스페인을 능가하던 때이었나 보다.

즉 세계 지도 상에 남북 직선의 이른바교황 자오선을 그은 뒤 그로부터 서쪽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땅은 스페인령, 그리고 동쪽에서 발견되는 땅은 포르트갈 령으로 삼게 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이후 포르트갈은 주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일본과 중국에까지 이르게 되고, 스페인은 서쪽 대서양으로 진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494년에 다시 그어진 교황자오선으로 인하여 브라질은 포르트갈의 영토가 되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단 하나 포르트갈 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오늘날 스페인어는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인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파라과이, 페루, 푸에르토리코,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 많은 국가들의 국어가 되었다. 또 미국의 경우 남부를 중심으로 중남미계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제 1 외국어로 자리 잡고 있다.

 

 

교황 자오선

동쪽으로 진출한 포르트갈은 1514년 중국의 마카오를 발견하여, 1557년에 중국으로부터 조차(租借)하였고 1887년에는 포르투갈령()이 되었다가 99년 후인 1987년 포르투갈과 중국은 1999 12월에 마카오를 중국 통치하에 복귀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리스본 항구, 떼주강 입구에 지어 진 벨렘탑.

포르트갈의 황금시대에 선박들을 검문하는 세관으로 사용되어지다가

그 후 19세기 초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밀물 때에는 바닷물이 죄수의 목까지 차 올라 왔었다고 한다.

1837년부터 같은 집에서 같은 레시피로 구워지는 커스터드.

아직도 맛보려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장사진을 이룬다.

이 말이, 그리고 요리법이 조금 바뀌어서 "카스테라"가 되어 오늘도 우리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후식이 되었다.

이것도 일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진 포르트갈 말이다.

리스본의 "로시오 광장"에 서 있는 브라질 초대 총독 돔 페드로 4

 

로시오광장의 바닥을 파도의 형상으로 수 놓은 모자이크.

 

파리의 에펠탑을 설게한 에펠이 부유층들을 부두에서부터 거주지인 높은 곳으로 올려 주기 위해 설치한 에레베이터. 요즈음은 전먕대가 되었다.

 

리스본의 골목에는 600~700년 전에 무어인들과 서고트족들에 의해 지어진 집들이 아직도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