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북 유럽 여행기

35 인어공주와 안데르센

천천히 chunchunhi 2014. 4. 27. 11:31

 

35 인어공주와 안데르센

 

안데르센이 살던 집에서 멀지 않은 랑겔리니 공원의 맨 끝자락에 인어공주 조각상이 있다.

칼스버그의 창업자 제이콥슨의 후원으로 조각가 "에릭센"이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서 영감을 얻어 자기 부인을 모델로 만들었으나, 허술한 보안의 바닷가에 있는 관계로 그동안 머리와 팔이 잘려 나가고 페인트를 뒤집어 쓰는 등 수난을 겼었었다.  1964년에는 머리 부분을 도둑맞고 찾지를 못하자 1984년에 지금의 새로운 동상이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조각상의 크기는 125cm의 자그마한 동상으로, 가까이 가서 보면 상상보다 작고 단순한 모양에 많이들 실망한다. 그러나 2010년 상하이 국제박람회 동안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그동안 이 곳을 찿아온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실망을 안겨 주도록 유명한 동상이다.

덴마크를 찾는 사람들은 꼭 한번씩 돌아보는 명소가 되어 1년에 1억명이나 되는 관광객이 다녀 간다는데, 인어공주의 동상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격은 인어공주의 작가 안데르센을 조금 더 드려다 보기로 하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4 2, 덴마크 제2의 도시 오덴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이고 어머니는 세탁부였으며,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그는 밖에서 뛰어놀기보다는 혼자 인형놀이를 즐기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가 11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가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져, 노래와 연기에 재능을 보인 소년 한스 크리스티안은 오덴세의 유력자 가문을 찾아다니며 재주를 선보이며 연명하는 동안 이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몇 년 뒤에는 본격적인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혼자 무작정 상경한다.

1819, 14세의 나이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도착한 안데르센은 여러 극단을 찾아가 입단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다행히 안데르센은 당시 정계의 실력자이며 예술 애호가인 요나스 콜린의 눈에 들게 되어, 일단 기본 학력이 있어야만 훗날 뜻을 펼치는 데에도 유리하리라는 조언과 함께,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왕실 후원금을 얻어주며 수도를 떠나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돌아오도록 독려했다.

1822년에 안데르센은 코펜하겐에서 멀리 떨어진 슬라겔세에서 동급생들보다 대여섯 살이나 더 많은 17세의 나이로 다시 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에죽어가는 아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의외로 호평을 받은 안데르센은 연기자에서 작가의 길로 선회하게 된다.

1828, 23세의 늦깎이 학생 안데르센은 6년간의 공부 끝에 학교를 졸업하고, 1833~4년에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요소가 깃든 장편소설 『즉흥시인』을 발표해 격찬을 받는다. 그리고 1835년에는아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동화집을 펴낸다.  아마도 이 때부터 그의 뉘하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지도 모르겠다.

 

그 후 안데르센은 「엄지 공주」「꿋꿋한 양철 병정」「인어공주」「벌거벗은 임금님」「성냥팔이 소녀」「눈의 여왕」「전나무」「나이팅게일」 같은 대표작을 비롯해 200여 편의 동화를 꾸준히 발표하며 명성을 쌓아 가던 중, 1843년에 나온 새로운 동화집에는 그의 최고 걸작인 「미운 오리 새끼」가 수록되어 있었고, 이 작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안데르센의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해졌다.  그로 인해 1846년에는 덴마크 국민으로선 최고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았고, 왕족과 귀족을 비롯한 상류층 인사들과 교제하는 명사가 되었다.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특히 안데르센의 열성 팬이 되어서 여러 번에 걸쳐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좀 독특한 행동(일설에는 그가 동성연애자였기에 고국에서의 소문이 두려워 자주 이태리로 여행을 하였다고도 한다.) 때문에 고국인 덴마크에서는 종종 혹평을 받아 가뜩이나 예민한 마음이 크게 상하기도 하여 평생 독신으로 산 그의 말년을 매우 우울하게 하여 주었다.

내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이다.” 안데르센의 말마따나, 그의 동화는 굴곡 많은 본인의 인생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기 작가 재키 울슐라거에 따르면 안데르센은  "성공한 '미운 오리 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이다.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이다.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 안데르센의 동화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계승한 것이어서 항상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는 않으며, 또한 비교적 덜 유명한 작품 가운데에는 의외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도 없지 않단다. 비록 동화 작가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긴 했지만, 사실 동화는 안데르센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는 시와 소설, 기행문과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고, 특히 극작가로 성공하기를 원했지만 평생 뜻을 이루진 못했다. 나아가 안데르센 자신 또한  '아동문학가'로만 낙인찍히는 것을 싫어했으며, 말년에 자신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의 동상을 세우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내 등에 태우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적이 없다. 내가 쓴 이야기들은 어린이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단지 내 이야기의 표면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내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어공주만 하여도 읽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서 느껴지는 느낌이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코펜하겐 시청사 옆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 또한 그 혼자 허공을 주시하는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875 8월 그가 죽었을 때 전 국민이 상복을 입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해마다 덴마크 인들은 "오딘 스토리 데이"라 부르는 파티를 통해 안데르센탄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1835년에 발표한 「공주와 완두콩」(왼쪽), 1836년에 발표한 「인어공주」의 본문에 삽입된 환상적인 그림

 

 

1867년의 안데르센(왼쪽), 1848년에 발표한 「성냥팔이 소녀」의 본문 삽화

해마다 1억명의 관광객을 불러 들이는 자그마한 인어공주.

 

해가 있는 동안은 하루 종일 이렇게 붐빈다.

 

1835년 엄지공주 삽화

 

시청 옆에 세원진 안데르센 동상. 누군가가 짖꿋게 루즈를 진하게 발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