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스톡홀름 시청과 노벨
23 스톡홀름 시청과 노벨
스웨덴의 관문인 스톡홀름은 발틱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에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물위에 세워진 가장 아름다운 수도 중의 하나로 불리운다.
해안가에 800만개의 붉은 벽돌로 지어지고, 1,900만개의 금도금 모자이크로 장식된 스톡홀름 시청사는 1923년, 라그나르 오스트베리(Ragnar Ostberg)의 설계로, 북유럽 최고의 건축물 중의 하나가 되어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여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상이 노벨상인것 같다. 얼마 전에 평화상이라고 하나 받기는 하였지만 그 때는 이 곳이 아닌 노르웨이의 오슬로 시청이었다.
노벨은 어떤 사람이며 왜 이곳 스톡홀름 시청에서 모든 상을 다 수여하는데 평화상만은 오슬로 시청에서 수여하는 것일까?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 10. 21~ 1896. 12. 10.)은 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주있는 건축기술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발명하기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가정의 살림은 나날이 빈궁에 빠져 들어가자 1837년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광산 발파용 폭탄과 기계공장을 세우고 사업에 성공하자 노벨은17세에 파리로 유학을 가 화학을 공부 한 후, 18세(1851년)에는 미국에 유학하여 4년간 장갑함 모니터호를 만든 죤 에릭슨 밑에 들어가 일하며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크리미아 전쟁(1853~56년)에서 러시아가 패전하는 바람에 노벨의 아버지 공장도 파산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노벨은 형님 두분과 함께 그냥 러시아에 머물러서 연구를 한 후 좀 늦게 스톡홀름에 돌아왔다.
1867년에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혼합한 안정한 규조토와 같은 물질을 만들었으며 그것을 좀 더 안전하고 사용하기 쉽게 변형하였는데, 이 혼합물들을 "Nobel's Safety Powder"란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레드힐 (서리 주)에 특허를 내었다. 그 후,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다이너마이트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1869년부터 파리 연구소에서 연구에 전념하여, 1875년 무산 화약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년에 들어선 노벨의 마음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큰 슬픔이 되어 노벨의 평화에 대한 바램을 키워 주었나보다.
노벨이 열일곱살 때 프랑스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하던 중 한 여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죽고 말았는데, 이 죽음의 상처로 노벨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이탈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1896년 12월 10일 숨을 거둔 노벨이 일년전 작성한 유언장이 공개 되었다.
자기 재산에서 생기는 이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 상을 주라는 유언이었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고, 그 당시 약 3,100만 크로네(340만 유로,440만 달러)라는 엄청난 기금으로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는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게 된 것이다.
경제학상은 1969년부터 스웨덴 은행에 의해 제정되에 노벨상은 6개의 분야로 늘어났다.
모든 상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수여되는데 유독 노벨 평화상만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여하라고 그의 유언장에 명시 되어 있으나 왜 그가 평화상을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게 한 이유는 분명치가 않다. 그 당시 노르웨이는 자치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스웨덴에 의해 합병된 상태였으며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이웃에서 경쟁과 협조를 해온 미묘한 관계였기에 두 나라의 우정을 증진시키고자는 하는 의미가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오슬로(Oslo)의 의미가 '하나님의 초원'이란 뜻이란다. 이를 염두에 두었던지는 모르겠으나 평화상 수상지와 참 걸맞는 이름인것 같다.
해안가에 자리한 시청사 원경
이태리의 베네치아 풍으로 건축된 청사 마당 앞이 바다다
시청사 근경
노벨상 시상 후 만찬장으로 사용되는 황금의 방. 금박을 입힌 모자이크로 치장이 되었다
“스토르토리에트 (Stortorget)" 광장에 있는 1776년에 건설한 증권거래소 장소가 2001년 노벨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노벨박물관으로 사용이 되고있다.
2층은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뽑는 한림원격인 스웨덴 아카데미본부가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