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교회, 그리고 나

2005-05-26 행복의 조건

천천히 chunchunhi 2012. 6. 1. 07:50

 

 

행복의 조건
데살로니가전서 516- 18(33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 주고 있읍니까?
갑돌이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일들이 갑순이에게는 같은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음을 우린 많이 보아 왔읍니다.
이렇듯 행복이란 다분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더 못 가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더 갖기 위하여 싸운다면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누리지를 못합니다.
제아무리 건강하고 제 아무리 모든 일이 형통하여 부를 이루고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고 불만가운데 있다면
그 건강이나, 부귀나 명예는  결코 행복해 질수 있는 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누릴 수가 있을까요?
행복이란 기뻐하는 마음이요,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 기쁨과 감사하는 말이 입박으로 절로 흘러 나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 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는 옛말이 있지 않읍니까!
이렇듯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옴을 우린 알아야 겠읍니다.
그런데 그 기쁨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가 참으로 쉽지가 않은 것이 우리 인생살이인것 같읍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우리 인간들은 어떨 때 어떻게 감사하는 가를 연구한 결과
그 감사를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놓았읍니다

그 첫째는 생각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비교에 의한 상대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이 감사는 순간적인 감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이런 감사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비교하는 대상의 변화에 따라서
나의 기쁨이 좌우되는 것, 즉 내 자신이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그런 감사인 것입니다.

1970년대에 카나다로 많은 분들이 이민을 오셨읍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이 잘 살지를 못하였는데 ,
또 인권이 억압을 당하였는데 여기에 오니 모든 것이 너무나도 좋았읍니다.
아파트에는 항시 더운 물이 나오지요,
먹을 것이 풍족하지요,
일을 하면 하는 대로 돈도 모을 수가 있지요,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니 이 곳에 오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함니다.
그 당시에는 그 비교적인 우월을 누릴 수 있는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언어 소통의 불편따위가 아무 문제꺼리가 아니었읍니다. 거저 검사할 따름이지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인 감사의 시절이었읍니다.
이런 감사는 항상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을 때에만 가능한 감사입니다.
내가 나와 비교가 되는 상대방보다 나을 때에만 느끼게 되는 상대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그 상대가 바뀌게 되면 원망과 후회로 바뀌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늘날엔 한국이 더 잘살게 되었지요?
더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이럴 때엔 옛날에는 감사하던 그 조건이 후회와 원망으로 변해진다는 말입니다.

거지 부자가 깡통을 들고 부자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고 있읍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은 재산을 꺼내지 못하여 울며 아우성을 치고 몸부림을 침니다.
그 때 거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
" 얘야, 우린 저런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행복하니. 다 네 아버지 잘 둔 덕인줄 알아라!"
여러분 웃으시지요?
부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담을 하나 하지요.
이 거지 아버지는 단순히 비교적인 행복감에서 이렇게 말하였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말 한마디에 깊은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우린 알수 있읍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 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하셨지요?
그러고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읍니다.
허지만 부자님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 가는 아주 쉬운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낙타를 저 멀리 노으시고 바늘 구멍을 눈에 아주 가까이 대어 보십시요.
낙타가 아니라 집채도 그 구멍 안으로 들어 옵니다.
요는 대상을 얼마나 멀리 놓고 보는 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낙타도 가까이에서 보면 장님 코끼리 만지고 싸움하는 격이 되지 않겠읍니까?

두번째 감사의 유형은 기본적인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한그릇의 밥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목이 마른 자에게는 한 컵의 냉수가 참으로 감사함니다.
추운 사람에게는 헌 담요 한장이 참으로 감사 합니다.
허나 배가 고팟다가도 두번째 그릇의 밥은 처음 그릇만큼 감사하지 못하고,
또 그 배란 불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 옵니다.
목마를 때의 한컵의 물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는데 두잔 석잔 마시다보면
그 고마움이 없어 집니다.
양이 많아지다 보면 오히려 곤욕스러워 집니다.
이런 감사는 지극히 시간적인 감사입니다.
나의 오관을 통하여 오는 느낌으로 얻어지는 감사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그런 순간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세번째의 감사는 은총적인 감사입니다.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삶의 근원에 기초된 영원 불변의 감사, 즉 종교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은혜가 놀라와 드리는 감사,
하나님과 원수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사랑을 확증해 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기쁨으로 드리는 감사,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죄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요, 영생을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 즉 은총적 감사요,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무엇에 대한 비교에 의한 감사가 아님니다.
육신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서 오는 순간적인 감사가 아니기에
육신이 병들고 괴로워도 느낄수 있는 감사요,
배가 고프고 춥고, 가진 것이 없더라도 드릴수 있는 원초적인 감사, 조건이 없는 감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이적을 일으키며 많은 병자를 고쳤읍니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질병은 고치지를 못하였읍니다.
우리 인간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읍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 많은 고생과 수모를 감내하였는 데도
자신의 몸에 있는 그 가시 하나를 안 없애 주니 말입니다.
아니 더군다나 그 능력의 하나님 께서는 그에게 더 큰 육체적인 고난을 주심니다.
오죽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며 탄식을 하였겠읍니까?
허나 그는 감사 했읍니다.
그 받은 바 은혜가 족하다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성령의 감동이 없고는 도저히 드릴 수가 없는 감사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성령을 받을 수가 있으며, 이런 감사하는 삶을 살 수가 있겠읍니까?
물론 사모해야 된다고 말씀 하시겠지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허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즉 우리가 요구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성령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과부가 재판장에게 아주 귀챦게 굴어서
그 재판관이 지겨워서 판결하는 예화가 나옵니다.
우리가 과부요 하나님이 재판장일 때 그런 행위로도 성령을 얻을 수가 있겠지요.
간구의 기도가 이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허나 그것 또한  은혜라는 점을 우린 늘 기억하여야 겠읍니다..
그래서 성령은 첫채로 임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은 충만하여야 합니다
이는 그 주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우리들 마음의 그릇을 깨끗히 비우고
주시는 대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물은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 탈란트를 주시는 것도, 열 탈란트를 주시는 것도,
오로지 주시는 분의 자유 의사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가 왜 나는 한 탈란트박에 안 주시느냐고 항변할 수 가 없는 것이 선물입니다.
내 노력의 결과, 내가 스스로 책정한 노력의 결과만큼 주어지는 보수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도 그것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한 탈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 놓은 게으른 종에 지나지 않읍니다.
비록 두 탈란트를 받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용하였을 때
네 탈란트의 결실을 얻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인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
즉 임재와 충만과 인도는  하나님께서 임의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원한다고,
우리가 간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니다.
단지 그것을 사모하고, 느끼고 사용하여 나타내는 것이,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즉 사랑, 희락,화평, 인내,자비,양선,충성,온유 절제는 우리 인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522)
그런데 이 아홉가지 열매를 보십시요.
사랑에서 절제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다 우리 인간들의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요
이성에 관한 것이 아닌 느낌, 즉 기분에 관한 것들입니다.
사랑을 하면서 기분나쁜 사람 보았읍니까?
기분이 나쁜데 희락이 있고 화평이 있읍니까?
인내하는 것도, 자비하는 것도 충성하는 것도 다 내 기분에 좌우되어지는 감정적인 것입니다.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충성하는 사람 없읍니다.
기분이 나쁠 때 절제, 참으로 힘들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을 갈구 하면서도 그 임재하시는 성령을 우리의 기분에 따라서 받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건 신앙의 미숙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어느 교회를 가 보시던지 장로님들이 회중기도를 하실 때 성령으로 임재하시라고,
성령 충만을 부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기도 한다는 기도를 들을 수가 있읍니다.
이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병든 자가 고쳐지는 그런 역사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성령의 열매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후에 나타납니다.

김상모목사님의 글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읍니다.
목사님께서 어느 집회에 가셨다가 집회 후 ride를 기다리며 쉬고 계신데
옆 방에서 회의하는 소리를 들으셨읍니다.
회의 내용은 야외예배 장소결정과 주관 부서의 진행 순서에 관 한 것이었는데
십분정도면 끝난다는 회의가 근 한시간이 넘게 걸렸읍니다.
끝나고 헤어지는 얼굴이 화기가 없이 씁쓸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언쟎은 기분이니 강사 목사님 대접이 제대로 되었겠읍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이게 혹시 우리 교회는 아닌지,
우리 당회와 우리 제직회, 우리 남.여선교회는 아닌지 반문하여 보았읍니다.

교회일에 헌신을 하면 기쁨과 평안이 따라야 할 텐데
오히려 교회일을 하고 보면 더 많은 분노와 미움과 좌절이 생깁니다.
의견과 견해의 차이로 친구가 적이 됩니다.
도무지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모두가 다 자기 주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하면서도 나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모습에 맞게 주님  내게 오시옵소서하는 내가 주관자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주장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할 수가 없읍니다.
임재가 없으니 충만할 수가 없고,
충만하지 못하니 그 인도를 따를 수가 없고
그래서 성령의 주위만을 맴돌다 보니 그 열매가 좋은 것은 알면서도,
그 열매가 행복의 조건이 됨을 알면서도
그 것을 바로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 당면한 현실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행복 하다는 것, 별것 아니예요.
예수님이 산상 수훈으로 가르치신 팔복을 보십시요.
어디 많은 물질이 행복을 준다고 하였읍니가? 권세가 행복을 준다고 하셨읍니까?
심령이 가난 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 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핍박을 받는 자
이 어느것도 물질에 관계된 것이 없읍니다.
부귀와 영화,명예에 대한 것도 없읍니다.
물질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부귀와 영화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행복의 주체인 감사하는 마음, 즉 즐거운 기분을  추구하지를 못하고,
그 기분의 상대적인 부와 귀와 영화를 탐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교회에 나오고 기분이 나쁘면 교회를 안나옵니다.
기분이 좋으면 봉사도 열심히 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일도 안하고 방관 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구제도 잘 하고 친구 대접도 잘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험당하고 악담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기분이 모든 것을 좌우 합니다.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쁘면 천당도 마다합니다.
지금의 기분, 여기에 좌우되는 사람들은 결국 두번째 유형인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에만 감사드리는 보편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으며 사는 저희 믿음의 성도님들은
성령의 임재와 충만 구리고 인도 하심에 따라감으로써
두번째 유형의 보편적인 사람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주님의 성도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 아침 말씀을 마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