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28 모순
모순 2009 2월 28일 토요새벽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옛날, 중국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요즈음으로 보면 무기 거래상인이겠지요.
그 당시의 무기는 주로 창과 칼이었고 방패가 유일한 보호막이었기에 얼마나 예리하고 강한 창인가에 따라서 , 또 얼마나 튼튼한 방패인가에 따라서 그 장수의 용맹이 결정되어지는 시대였지요.
어느 장수가 창을 사러 왔읍니다.
창 파는 사람이 하는 말이
“이 창은 세상의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가 있는 예리하고 강한 창입니다” 라고 선전을 하며 창을 팔았읍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장수가 방패를 사러 왔읍니다.
이 장사가 하는 말이
“ 이 방패는 세상의 그 어떤 창도 뚫을 수가 없이 튼튼한 방패입니다.” 하면서 선전을 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에이 여보슈!. 아까는 그 창이 어떤 방패라도 다 뚫는다고 해 놓고서, 이제는 이 방패가 어떤 창도 다 막는 다고 하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여기에서 모순이라는 한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모순이지요.
서로 상반된 견해가 다 옳다고 하는 것이 모순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도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모순 되는 점들이 참으로 많이 있읍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두 본문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와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기에 믿음으로 밖에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다는 갈라디아서의 말씀, 서로가 상반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성경 안에 있읍니다.
모순이지요.
(행 15:38-40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사도행전 15장 38절에서 40절까지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싸운 후에 갈라서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읍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까?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바울이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가 있었으며, 바나바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이 어찌 그의 회심을 간증할 수가 있었으며, 또 그의 능력을 발휘하여 전도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 수가 있었겠읍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큰 은혜를 입힌 사람, 자신의 성장에 디딤돌이 되어 준 사람하고 하챦은 일을 가지고 다투었읍니다.
그 것도 심히 다툰 후에 갈라 섰다고 기록되어져 있읍니다. 그 후로는 바나바라는 이름이 별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지요.
고린도 전서의 사랑 장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 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는 바울입니다.
이런 바울이 자신은 마가를 데리고 가느니 마느니 하는 하챤은 일로 자신에게 큰 은혜를 입힌 바나바와 다투고, 그것도 심히 다투고 갈라 섰읍니다.
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예수님은 또 어떠셨읍니까?
저희들에게 원수도 사랑하라시며, 오른 쪽 뺨을 때리거던 왼쪽 뺨도 내 밀라시고, 겉옷을 달라거던 속옷 까지도 벗어 주라시던 예수님이 왜 바리세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시며, 성전에서 환전하는 장사꾼들의 기물은 왜 부시었읍니까?
말씀과 행동이 상반되지 않아요? 모순이 아니예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여 주신 돌아 온 탕자의 이야기 또한 얼마나 모순입니까?
이 비유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열심히 일하겠읍니까?
있는 것 다 탕진하면서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즐기면서(? 정말 즐기는 일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살다가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 가기만 하면 다시 제 자라로 돌아 갈 수가 있는데 말이예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비유 또한 모순이지요.
말씀이 좋와 예수님 무릎 앞에 앉아 있는 마리아는 칭찬을 받고, 그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부엌에서 분주히 일하는 마르다는 책망까지는 아니지만 좀 못마땅한 소리를 들으니 그 누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신명나게 일을 하겠읍니까?
당장 오는 주일부터 모두가 말씀 앞에만 앉아 있었기에 예배 후의 친교시간에 커피도 없고, 빵도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삭막하겠읍니까?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선한 영만 넣으셔서 그 에덴 동산에서 천년 만년 평화롭게 살게 하시지 왜 악한 영까지 허락 하시어서 이 괴로운 세상에서 아웅다웅거리며 살게 하십니까? 그리고는 그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힘들게 믿게, 그 모순이 내재한 성경을 믿게 하셨읍니까?
또 한가지 아주 모순 된 것이 있지요.
우리는 하늘나라가 참으로 평화롭고 영원히 살기 좋은 곳이라고들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읍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우리 어느 누구도 오늘, 바로 지금 거기로 갈래? 하면 한사람도 가겠다고 하지를 않읍니다.
이 또한 모순이 아니예요?
그런데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에 대한 답도 성경안에 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지 핞았읍니까?
우리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으로는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 처럼, 콩쥐와 팥쥐의 이야기 처럼, 심청의 이야기처럼 권선징악으로 결말이 나야 모순이 안되는 이야기가 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권선징악의 이야기보다는 악하던 사람이 구원받는 이야기로 귀결이 됩니다.
피상적으로 그 한 단면만을 보면 이런 일들은 분명히 모순입니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잘 못된 것일까요?
가만히 이 모든 모순된 것 같은 이야기들을 음미하다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읍니다.
악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회개의 과정이 있는가하면 믿음을 결단하는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탕자도 후회를 하고 돌아 왔기에 아버지가 반겨 보선발로 뛰어 나가 맞아하였던 것이고, 예수님 우편의 강도도 믿노라는 결단을 하였기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할 수가 있었지, 후회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이나 성전의 환전상들은 결코 용납이 되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에 말 한 창과 방패이야기로 잠시 돌아가보지요..
만일에 그 창과 방패를 한사람이 다 갖이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그래도 모순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가 있을까요?
그 창을 가진 장수에게는 정말로 못 뚫을 방패가 없을 지도 모르겠읍니다. 바로 그 장수가 어는 누구도 뚫을 수가 없는 방패마저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 한 장수가 어떤 방패도 막을 수가 없는 창을 가졌고, 그 같은 장수가 어떤 창도 뚫을 수가 없는 방패를 가졌을 때 그는 아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오를 때 비지 땀을 흘리고 오릅니다.
때에 따라서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손가락 끝에 전신을 매달면서 바위를 타고 오릅니다. 그리고 올라선 정상에서 심 호흡을 하며 저 발아래 세상을 바라 보는 호연지기, 그 느낌을 위해서 우린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산을 오릅니다.
이렇게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산에 대한 경외감이 있읍니다.
그 산을 어렵게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성실하게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계곡에 앉아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채 먹고 마시다가 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케이블 카를 타고 휘~익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 보고 내려 온 사람들은
산을 우습게 압니다.
그리고 그 산을 힘드려 올랐다가 내려온 사람들에게 비아냥 거립니다.
‘또 다시 내려 올 것을 왜 그리 힘드려서 오르누…쯪쯪쯪…”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산을 올랐다 내려 온 사람하고, 거저 계곡에서 발 닮그고 놀다 온 사람하고 똑 같은 사람일가요?
분명히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분명히 능력이 다르고,경륜이 다르고, 경험이 다른 사람입니다.
2004년 미국 뉴욕에 있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피카소의 그림 한장이 기록적인 가격으로 팔렸읍니다.
그림 한장의 가격이 1억달라에 낙찰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피카소 하면 보통 연상하기를 그냥 봐서는 잘 알 수 없는 그림, 좀 무식하게 이야기 하면 어린아이가 장난 한 것 같은 그림들, 도대체 무엇을 그리려고 하였는지 문외한의 눈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난해한 그림으로만 알고 있는데 그날 팔린 그림은 피카소의 그림답지 않게 “파이프를 들고 있는 사람” 이라는 그림이었읍니다.
누가 보아도 파이프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읍니다.
사진으로 본 그림의 붓의 흐름은 마치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느끼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읍니다.
피카소도 그가 화가로서 유명해지고 그 이름을 얻기까지에는 엄청난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그리던 뎃상에서 부터 시작해서 오랜 세월을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실험을 하고, 그래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무명시절에 그의 말년의 작품같은 그림을 그렸다면 아마도 그는 광인 취급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읍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라고 갈파 한 그 대목은 마치 힘드려서 그 산을 올랐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내려 온 후에 나온 말이지 거저 계곡에서 놀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다, 하다, 하다 안 되어서 이제 자기의 자존심을 죽이고,
자기의 아집을 죽이고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다 내려 놓고 이제는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긍휼에 힘입어 구원에 이룰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온 말이
결국 인간의 행위나 능력으로는 안된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이 나오기 까지에는 엄청 많은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그의 신념을 행동으로 열심있게 옮긴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얼마만큼 열심이었나 하면 스테반집사의 순교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하였고, 또 다메섹이라는 먼 곳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갈 만큼 열정적인 행동파였읍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신념에 근거해서 “이게 아니다”싶으면 자신을 불태워서까지 이루려는 열성적인 행동파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강권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시었읍니다.
그리고 꼬꾸라 졌읍니다.
육의 눈이 멀면서 영안이 열리기 시작 하였읍니다.
자신이 여지껏 옳은 일이라고 믿고, 그래서 자신을 내 던져 행동으로 이루려 하던 그 일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닿게 되었읍니다.
물론 하루 아침에 바뀐 일은 아님니다.
많은 시간동안 번민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였었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일단 자신이 믿고 신봉하며 행동으로 옮기던 그 믿음이 바른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았을 때엔 거침없이 그 모든 옛 구습을 벗어 버리고,
자기가 그 전에 좋와 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기면서 새로운 믿음에 전력 투구 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읍니다.
그의 열심적인 행동이 그 바뀐 믿음에 따라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인 13권의 책을 써서 우리에게 어떤 것이 바른 믿음의 길인가를 알려 주려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어떻게 하면 산을 안전하게 잘 올랐다가 내려 올 수가 있을까를 가르쳐 주며 자세한 지도까지 곁들인 등산가이드 처럼 말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어떤 신학적인 근거가 있고, 또 어떤 상황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인가는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 서로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동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명제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선언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읍니다.
또 여러분들이 저에게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사도 바울 처럼 그의 혼신을 다 바쳐서 행동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믿음을 3차례에 걸친 선교여행뿐만이 아니라 그 많은 저술을 통해서 행동으로 나타 내었던 사도 바울이기에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입을 수 없다”는 말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얼마나 행하였다고, 그 행함은 젖혀 놓고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구원이니 나는 오로지 믿노라 하는 그 믿음이 같은 믿음이겠읍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서로 상반되는 모순을 읽을 때 이것이 모순이라고 느끼는 우리의 지식과 상식을 뛰어 넘어 그 비유가 가르쳐 주려는 참 의도가 무엇인가를 볼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참 좋겠읍니다.
그래서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사도 바울의 외침처럼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또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예리한 창으로 무장한 우리가 되어 우리의 지식을 뛰어 넘고, 우리의 상식과 관습에 매이지 않은 채 새로워 진 영의 눈으로 내일을 바라 보며 오늘에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