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06 만남
만남 2008년 8월 16일
[개역]행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개역]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목사님이 우리 교회를 떠나 광주 다일교회로 가시게 되면서부터
우리 교우들 사이에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나뉘어 졌읍니다.
지난 주에는 최상봉목사님을 통해서 또 “어떤 만남”이라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지요.
이번 주간에 우리들이 묵상하는 광야의 만나가 마침 사도행전 16장 15절에서 마치었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사도행전 16장 13~14절을 잡고 보니
오늘 아침에 또 만남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되었읍니다.
허기사 우리의 인생이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니
오늘 또 한번 만남을 이야기 한다고 해서 그게 뭐 대수이겠읍니까?
오늘 아침은 사도 바울의 만남을 되 집어 보면서 과연 우리는 앞으로 어떤 만남을 만날 수 있을까?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하는 것입니다.
만남 하면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떠로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래 전에 한참 유행한 가요, “만남”인가요?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만남, 우연이던 필연이던 이런 만남은 육체적인 만남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이런 것이 육체적인 만남이지요.
육체적인 만남의 제일 처음 만남은 부모님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그 후에 형제와 친척들을 만나게 되고,
동네의 소꼽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커가다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학우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지요.
조금 더 커서는 배우자의 만남을 통해서 또 자녀들과의 만남이 이루어 지게 됩니다.
이런 만남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인생이 지나가고, 육신이 늙어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육체적인 만남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의지대로 만날 수도 있고
또 안 만날 수도 있읍니다마는 어떤 만남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숙명적으로 만나야 하는 만남이 있읍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 혹시 여러분이 선택해서 여러분의 부모님을 만나신 분이 계십니까?
“나는 이러 이러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강한 바램이 있다고 한들
그런 부모님 을 가지고 태어 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요.
물론 예외가 있읍니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나 자수성가한 위대한 사람들을 우린 많이 알고 있지요.
또한 부모를 너무 잘 만난 나머지 그 인생이 허랑방탕으로 끝나는 경우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여기에서 부모를 잘 만났다, 못만났다하는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에 지나지 않읍니다마는 그 부모를 만나서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고 어떻게 성장하며 또 신체적으로는 어떤 유전인자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대체로의 삶이 결정되어지는 게 보통 우리들의 삶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바울은 비록 팔삭둥이로 태어 났지만 그는 나면서부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 났읍니다.
그 부모는 유대 땅을 떠나 그 당시 큰 성인 다소에서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였지만 중에서도 꽤나 성공한 사람이었던것 같읍니다.
그 아들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시키면서 유대인의 율법을 전수 받게 하였으니까요.
가말리엘하면 마치 요즈음의 아이비 리그처럼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흠모하던 일류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연으로 인해서 만나는 사람들도 대체로 사회의 상류 계급이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에게서 허가증을 받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다메섹까지 갈 정도로 그는 배움에 충실하면서 그 인맥에, 그 학연에 의한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면서 누구를 만났읍니까?
예수님을 만났지요.
바울이 만나고 싶어 만났읍니까?
아니지요. 강권적으로 만났읍니다.
이 만남이 바울의 남은 평생의 삶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만남은 육체적인 만남이 아니라 영적인 만남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 난 후에는 누구를 만났읍니까?
아나니아를 만났지요.
아나니아는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 당시 유대 땅을 떠나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으로서,
경건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읍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 난 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줄 인도자를 제대로 만난 셈이지요.
바울이 회심을 하였읍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만나고 체험한 예수를 전해야 하겠는데 지나온 날들의 과거 때문에 아무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읍니다.
마치 양치던 목자가 재미 삼아 “늑대다. 도와 주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두번까지는 사람들이 달려 왔지만 막상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양치기에게 달려 들 때에는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던 것 처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전력을 안 좋게 알고 있었던것입니다.
사막으로 나가 기도하며 고행하던 시간을 거친 후에 또 하나의 귀한 만남을 얻게 됩니다.
바로 바나바와의 만남이지요.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가르치던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와 함께 전도를 한 결과 안디옥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이라고 불리우도록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 났던 것입니다.
그 후에 또 한 사람과의 귀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있는 대로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서방 전도가 시작되는 그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바울은 많은 육체적인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에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천막을 지으면서 함께 사역하고, 디모데를 만나고, 누가를 만나고,그 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바울의 전도가 이루어지고, 기독교의 교리가 체계화 되기 시작하였으며,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서방 세상으로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육체적으로 만난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세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바울에게는 또하나의 귀중한 만남이 있었읍니다.
감정적인 만남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있을런지 모르겠읍니다마는 저는 이것을 감정적인 만남이라고 부르고 싶읍니다.
우리의 육체에는 영이 있고 또 감정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또 감정의 만남이라는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열 대여섯이 되어서 만나는 사춘기,
결혼 후 만나는 권태기,
40을 전후해서 만나는 갱년기,
60 즈음에 만나는 사추기
이런 것들이 대체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가 만나는 감정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가 있겠읍니다마는 이런 감정외에도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주어
한 평생을 통해서 작용할 수 있는 더욱 큰 감정적인 만남이 있읍니다.
사도행전 15장 30절과 31절을 읽어보도록 하지요.
[개역]행 15:30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개역]행 15: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어떤 내용입니까?
왜 이 간단한 구절이 그렇게도 큰 감정적인 만남이 되는 것일까요?
벌써 감을 잡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문제가 생겼읍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로 많은 개종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는 또한 바울의 전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읍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사도이기는 커녕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였다”고 하면서 이 곳에 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할례를 안받아도 된다”고 하니 그의 사도권에 대해, 그의 자격에 대해 비난하는 유대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인간적으로 커다란 약점이 잡힌 셈이지요.
자신은 더 자신이 확실하게 체험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데 자신에 대한 자격논란이 일어나니 의기 소침해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려 달라고 탄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사도들 간에도 오랜 논쟁이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수석 사도인 베드로의 결단으로 사도행전 15장 28절과 29절에 나오는 대로 성령과 요긴한 것,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 매어 죽인것과 음행을 멀리 하는 것 외에는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읍니다.
아마도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회의였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
이 결정을 좀 더 확실하게 전해 주기 위해서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까지 보내어서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임을 입증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제 입으로 제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회의를 한 결과 파송한 대사가
직접와서 확증을 하여 주었으니 그의 사도권이 권위를 얻게 된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전도사의 자격증을 받은 셈이란 말입니다.
이 후 부터 바울은 더 담대하게 전도하고 선교하고 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만남, 자신을 확인해 주고 격려해주는 마음의 만남이 그의 남은 평생동안 그에게 힘이되고 용기가 되었던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만일 그 때에 사도들이 “우리가 너를 바로 잡아 주지 않으면 누가 너를 바로 잡아주리요.” 하면서 바울에게 “네가 잘못 했노라” 하였더면 어찌 되었을까요?
기독교의 역사가 달라 졌을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아주 귀중한 마음의 만남, 감정의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싶읍니다.
사람의 능력이란, 사람의 감정이란 제 안에 있으면서도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없이 위축되었다가도 이렇게 외부에서 누가 인정해 주고 권위를 세워 주게 되면 더욱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도 그 한 고비를 중심으로 그 전과 후가 판연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육체적으로 부모를 만나서 성장하다가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이제 이런 감정의 만남을 가진 후에 그 삶에서 일어나는 담대함은 사도행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서신서에 잘 나타나 있기에 부언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만나고 있읍니까?
이 앞에서있는 저를 만나고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를 애타게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따뜻하게 격려하며 마음의 힘을 길러 주는 감정의 만남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를 만나는 것이 아니요,집에서 기다리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자원하여서이던지, 아니면 강권적으로이던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그 예수를 만난 바울 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면서 어제까지 중하고 귀하게 여기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도록 우리의 마음의 가치관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결단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만남, 감정의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아침, 새벽을 깨우며 주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가
영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감정적으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귀한 만남을 함께 가지는
좋은 아침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함께 기도 드리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