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롤로우스 유적지- 캄보디아, 씨엠립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까? 롤로우스 유적지
2009년 7월호 NG에 실린 씨엠맆 주변 지도
롤레이 사원
벽에 새겨진 옛날의 여인
돌 속에서 나왔나? 새 사람이 보슬비를 맞으면서.... 그 앞의 부서진 돌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사원 옆에 새로 지어진 사원 옆에 우물가에서 양치하는 사람.
우리같으면 몇일 설사를 할 테인데....
프레아코는 "성스러운"신성한"소라는 뜻으로 슈바가 타고 다니던 "소"난디를 의미 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소였겠지. 지금은 탈 수가 없는....
프레아코 사원
사원 안의 모습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진 비문
프레아코 사원 입구의 문설주에 새겨진 산스크리트어. 이 아이의 장래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직은 탈 수가 없이 어린 송아지. 태어난지가 얼마 안되는 것 같았다.
생명이 있는 소, 그래서 유한한 소와 생명이 없는 소. 그래서 영원히(?) 남아 있을 수 가 있는가보다. 부져질 망정....
이네들이 파는 비단 목도리. 여기에 오기 전에 비단농장을 들려 왔었다.
석양을 보기에 가장 좋다는 바콩사원
한참을 기어바라 올라가야만 한다.
때마침 그친 비 뒤로 나타난 무지개.
석양대신 무지개를 보았으니 꿩대신 닭이었나? 닭대신 꿩이었나?
가파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5 롤로우스 유적지- 캄보디아, 씨엠립
롤로우스라는 저수지 안에 섬이 하나 있고 그 섬에 롤레이 사원이 있었다.
지금은 그 저수지가 다 말라서 어디서부터 물이 있었던지를 알 길이 없고, 그 섬안에 있던 롤레이사원도 많이 폐허가 되어 보수를 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페허가 된채로 이런 자리에 이런 것이 있었노라는 인증을 받기 위해 관광객들을 찿아 오게 만든 것 같다.
그 옛날 사원 옆에는 현대식 사원이 하나 지어져 오늘의 참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롤레이사원은 9세기(893)야소르만1세가 부친의 업적을 기려 건립한 사원이라고 한다.
땅은 비옥하나 오랜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수도 없고, 식수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를 안타까이 여긴 부왕, 인드라바르만 1세가 인더라따까라는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었단다.
후에 아들 야소바르만 1세가 프롬바켕산을 중심으로 수도 이전을 계획함과 동시에 한가운데에 인공섬을 만들어 선조에 대한숭배와 애도로 헌정한 사원이라고 하는데,
천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물이 없어 호수였다는게 상상이 안가는 폐허가 되어있는 것이다.
버스가 서자 마자 아이들이 손에 손에 물건들을 들고 와서는 사라고 아우성이다.
물건들이야 무에 그리 쓸만한게 있으랴마는 그래도 이게 그네들의 생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 사주는 것이겠지.
이런 유적지를 놀이터 마냥 품고 사는 동네 아이들의 헐벗은, 그러나 맑은 눈망울이 평화스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한 느낌을 자아 내었다.
프레아코사원
프레아코는 "성스러운"신성한"소라는 뜻으로 슈바가 타고 다니던 "소"난디를 의미 한다고 한다.
879년,인드라바르만 1세가 자신의 부모,외부모등 조상께 헌정한 사원으로 출입문에 조상들에 대한
공덕? 비문이 산스크리트어로 음각되어 있었다.
이 사원이 소를 의미하여서인지 마침 그 옆에는 갖 태어난 어린 송아지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 다.
바콩사원
프레아코 사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바콩사원은 881년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 힌두양식으로 건립된 앙코르 왕조의 중앙사원이였다고 한다.
초기 앙코르 왕조의 도읍지인 롤로스유적군 가운데 규모가 커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이었지만 아직 전체적으로 다 복원이 되어지지가 않았다. 이 사원의 맨 위로 오르면 지는 석양을 보기가 장관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찿아온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할 때에는 석양을 볼 시간이 아니기에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마침 비가 그친 후라 석양대신 무지개를 보며 가파른 계단을 기어 오른 댓가로 만족할 수가 있았다.
전체적으로 이 곳은 너무 폐허가 되어 앞으로 어떻게 복원이 되어질지….
난감한 느낌을 주는 유적지라는 인상을 받으며 갔던 길을 되 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