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앙코르 여행기

2 앙코르 톰 - 바이욘사원 – 캄보디아, 씨엠립

천천히 chunchunhi 2011. 6. 2. 01:01

 

 앙코르 톰으로 들어 가는 입구

 

 나가 앞에서... 마치 부처님처럼 그의 보호를 받으며....근데, 웬 녀자? ㅎㅎㅎ

 

 나가(뱀)의 몸통을 들고 있는 석상들

 

 

 

 

 

 문 위의 조각을 조금 가까이에서...

 

 100미터나 넓었던, 그러나 말라가는 해자.

 

 

 또 다른 문. 동서남북으로 네개가 나 있다.

 

 

 

 

 

 우리가 타고 뉴볏던 오토바이력거 여기 이름으로 뭐라 했는데....

 

 

 

 왕이 사열을 받던 연병장, 코끼리 테라그

 

 

 

 연단처럼 높이 축조되었다. 오늘은 왕 들....

 

 

 

'피미아나까스'.

13세기 앙코르톰을 찾은 주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하루도 빠짐없이 탑에 올라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뱀의 정령과 동침을 한다" 적혀있고...

" 임무를 하루라도 거르면 나라에 재앙이 온다" 하는데……

정말이었다면 이유 때문에 거대한 왕국이었던 크메르 왕국이 망했던 걸까.

당시에는 ~아그라가 없었을 테니까….

 

 

 

 왕의 침실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니... 녀자들이 많더라.

 

 

 

 

 

 

 54개의 탑에 4개씩 조각되어 216개의 부처상이 있었던 바이욘 사원 앞에서

 

 바이욘사원 내부

 

 

 

 

 

 

 

 

 

 부처의 얼굴이 높이 놓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낮게 놓여지도록 길들이 만들어 졌다.

 

 한국 절에는 여자들의 모습이 없는데... 여기는 맨 여자들 조각이니 아마도 우리가 아는 절하고 여기 절 하고는 좀 다른 모양인지.....

(아님 불교를 모르는 나의 무식의 소치이겠지...)

 

 

 

 

 

 

 

 

일행을 잃어버렸다 찿은 후에 한숨 쉬며 나온 문.

 

앙코르 -  바이욘사원 캄보디아, 씨엠립

 

프롬에서 2km 떨어 있는 앙코르 !

 

앙코르는 크메르어로 도시라는 뜻이다.

톰은 크다는 뜻이고 보면 결국 도시라는 말이 되겠다.

 

그대로 지금은 복원이 앙코르왓 사원이 알려져 있지만,

크기 면에서는 앙코르왓을 훨씬 능가하는 가로3km, 세로4km 거대한 사원이다.

곳에 들어 가려면 "나가"라는 머리 일곱개 달린 배암이 길게 늘어서서 해자 위로 생긴 다리의 난간을 만들고 있는 가운데를 통과하여야 한다. 워낙이 뱀이 되어서인지 몸통을 받쳐 들고 있는 석상들의 모습이 모두 장군깜이다.(마치 옛날 한국의 동구능에 가서 보던 석상과 많이 비슷한 모양이기도 하다.)

사원 둘레에 파여져 있었던 해자의 넓이는 100m 이었지만  지금은 물이 많이 말라 훨씬 좁아진 채로 옛날에 물이 있었던 흔적만을 보여주고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커다란 돌문위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모습의 얼국 조각을 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부처님 얼굴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야바르만7세의 얼굴이라고도 한단다.

얼굴 밑으로 길을 통하여 들어가면 앙코르 톰안으로 들어 것이 되는 것이다.

 

(Naga : 머리가 일곱 달린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할 나쁜 짐승으로부터 그를 지켰으며, 머리를 부채처럼 활짝 펴서 비로부터 부처를 보호했는데, 이러한 보호의 개념 때문에 사원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여겨져, 사원입구부터 세우는 것이 크메르 건축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앙코르 톰은 어떤 곳일까?

 

 

왕국의 기반을 닦은 수르야바르만 2세가 자신의 영생을 위해 건축한 앙코르와트가 신을 모시는 사원이자,무덤이라면, 그보다 50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왓보다 크게 건설한 앙코르톰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계산되어 만들어진 사원이자 계획도시였던것 같다.

 

12~13세기 당시 중국의 원나라조차 세력을 주시했을만큼 번성한 크메르 왕조의 전성기 때의 수도로서, 수십만호의 백성들과 성직자, 그리고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고 다니던 자야바르만 7세의 막강한 군대가 주둔하던, 당시 동남아 세계에서도 손꼽을만한 거대한 도시였단다.

이사원 내부에는 바이욘사원, 바푼, 피미아나카스 사원, 코끼리 테라스, 레페르 왕의 테라스, 프라파리라이 등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렇듯 고도의 계획도시였던 앙코르톰에 대한 문헌 기록은 캄보디아에는 현존하지 않으며, 1296~1297 캄보디아를 찾은 원나라의 사진 주달관이 기록한 기행기인 <진랍풍토기>에만 남아 있단다.

 당시 앙코르톰의 모습과 왕궁,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 모습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는데, 크메르왕국을 굴복시키고자 캄보디아를 찾은 원나라의 오만한 사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거대하고 이국적인 문명을 자랑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이후 1861 프랑스의 역사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다시 앙코르 유적이 세상이 알려지기 전까지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보니 이렇게 화려하고 강대한 문명을 이뤘던 크메르 왕국이 멸망했는지 길이 없다는 것이다.

 

15세기 지금의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으로 천도를 하는 바람에 수도인 씨엠립이 폐허가 되었다는 정설이라는데, 이렇게 화려한 문명을 가진 왕국이 프놈펜으로 옮겨서는 제대로 유적 하나 남기지 못했으니 이또한 역사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그러나 실제로 앙리 무어가 이쪽을 탐사할 이미 오래전 폐허가 되어버린 앙코르톰은 이곳 거주민들에게 거대한 신들이 사는 지역으로 알려져 캄보디아 현지인이 가기를 꺼리는 금단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바이욘  사원 불교사원으로 건축되어진 사원이다.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54개의 탑이 웅장하게 솟아았는데, 지금은 5개가 파손되어서 49개가 보존되어 있단다.

54개의 탑이었을까?

54개에 4 곱하면 216 된다.

불교에서 흔히 쓰는 인간들이 부딫치는 108번뇌! 이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 같은데….

사진을 찍노라 가이드의 말을 흘려 듣는 바람에 연결고리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집에 와서 다른 자료를 찿아 보아도 보이지가 않고….

하여턴 현재 남아있는 196개의 부처님 얼굴(자야바르만7세의 얼굴이라고도 ) 하나도 같은 얼굴이 아니도록 조각이 되어 있었다.

 

얼굴들이 미국의 바위 얼굴이나 아니면 유럽의 커다란 동상 조각처럼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여려개의 돌들을 마추어 조각 되어진 얼굴들을 보면서 처음 방문객인 우리에게는 미로일 밖에 없는 길들을 따라 다니다 앗차하는 순간에 일행을 놓쳐 버렸다.

앗차라는 순간에도 나는 캬메라를 드려다 보고 있었으니 때문에 일행을 덤으로 놓친 나의 반쪽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허둥댄다고 일도 아니건만 불이나케 내려와서 사방을 둘러 보아도 보이는건 사람인데 우리가 찿는 사람은 없으니 어얄꼬…..

이리 저리 뛰다 보면 우리 둘이 잃어버리겠기에 여기 꼼짝말고 서있어하고는 혼자 뛰는 결국은 있었던 것이 효험을 발휘해서 우리를 태우고 다니던 오토바이 운전수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한번 줄을 잃어 버리는 작태를 연출하였었지. ㅎㅎㅎ

그런 우리를 내려다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거대한 얼굴 밑으로 남문을 빠져 나와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가장 복원이 , 그래서 우리에게 알려진  앙코르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