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토론토지역/터키 여행기

이스탄불. 2차 순례기 18

천천히 chunchunhi 2008. 11. 30. 09:40

 

 지하궁전에 수장된 메두사

 지하궁전

 불루 모스크

 모스크 내부의 청색 타일

 토프카프 궁전

 궁전 내 박물관 회랑

 히포드럼에 잇는 이짚트 탑  디킬리타스(Dikilitas)

 돌 탑

 배암 탑 "오르메 수툰(Orme Sutun)",

 성 소피아 성당

 성당 2층 복도

 회벽 밑에서 건져낸 모자이크

 보스포러스 해협

 

 

2 순례기 18 이스탄불.

 

지하궁전(물 저장소)

어둠 속을 한참 달리니 멀리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 한다.

조금 밝아지자 시야에 들어 오는 높은 정상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여기, 아래는 벌써 이른 여름이 다가 왔는데….. 그만큼 높은 산이었다.

조그마한 시골 비행장이다. 트랩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비행기에 올라 조그마한 창으로 보이는 흰눈을 이고 있는 산을 바라보며 지난 며칠을 뇌어 보았다.

쿠샤다시에서 부터 시작해서 갑바도기야까지 구불구불 돌아 길이 3000km 거리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직선 거리로 631km  떨어져 있는 터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로 비행하는 것이다.

버스로 가면 것이 많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지름길로 가야지.

6 40분에 출발한 비행기가 땅에 닿은 것이 7 50분이니 한시간 10 만에 631km 날라 셈이다. 세월 좋와졌다.

 

이스탄불,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곳으로 옮긴 부터 1600년간을 세계의 수도로 번영하며 120명의 황제와 술탄에 의해 지배 되어 ,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도시이다.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동로마로 불리우다가 자연스레 비쟌틴 제국으로 불리워진,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 번성하였던 제국의 수도가

왕족과 교회 관계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음모와 , 이에 덧붙여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공으로 기독교의 유산들이 파괴되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를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십자군전쟁은 오히려 곳에 산재한 많은 기독교의 유물들을 부수어 라틴계 유럽으로 반환하는 바람에 더욱 황폐하여졌지만,  슐탄 마호멧 2세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다시 태어나면서 이슬람의 영향력아래 다른 번성기를 맞이한 도시가 되었다.

 

시기에 많은 교회의 유적들이 사원으로 개조 되었고, 많은 기독교 유물들이 횟가루 속에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1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터키가 완전히 몰락한 , 유럽 연합국에 의해 나라가 분열될 위기에이르자  무스타파 케말의 인도하에 독립을 쟁취하여 오늘의 터키로 부흥발전 되기 까지, 발전과 몰락의 영욕을 함께 경험한 자취로 얼룩진 고도,

 

이스탄불에 내리니 조금씩 비가 뿌리고 있었다.

비가 때엔 어떻게 해야하지?

안맞으려면 집으로 들어 가야지?

먼저 지하궁전이라고 불리는 지하 저장소로 들어 갔다.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고리에 있는 이스탄불은 오랜세월동안 많은 민족들의 이동 경로가 되어 수없이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저수지가 소피아 성당 맞은 편에 위치한 지하궁전(Yerebatan Sarayi)이다.

물은 이스탄불로 부터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부터 수로를 통해서 공급했고, 8 톤의 물을 저장할 있는70m 폭에 길이는 140m 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하 저수저다.

 

건물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건설되었으며 336개의 기둥과 천장 장식이 고린도식 석주로 화려하게 건축되었기때문에 이를 지하 궁전(saray : palace) 이라 부른다.

 

1985년에서 1988 사이, 이스탄불 시는 저수지에 쌓여있던 2미터 정도의 진흙을 퍼내고  새로 단장하였단다.

기둥들 사이에는 콘크리트와 나무로 도보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어 것이다.

옛날, 아니 곳이 지어 것에 비하연 바로 어제보다도 가까운 1964 경에 007영화에서 처음 지하 저수지.

때에는 영화 속에서 제임스 본드가 나룻배를 타고 움직여서 소련 대사관 밑으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돌며 웅장한 지하 궁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석주 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 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겠다.

가이드를 따라 깊이 안쪽으로 들어가니 기둥의 받침돌이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메두사의 머리도 똑바로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는 옆으로 뉘어있고, 다른 하나는 아예 거꾸로 놓여 있었다.

결국 메두사의 머리에 있는 수많은 뱀들이 천년이 넘게 물에 담겨있었으니 이게 결국 정력에 좋다는 뱀물이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무도 마시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젠 모두들 정력이 필요 없는 나이들이 되었나? ㅋㅋㅋ

이는 아마도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방신들을 믿지않는 기독교들이기에 일부러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싶단다.

메두사의 머리도 어디엔가 있었던 신전에서 뽑아 온것만은 확실한데 그게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지금은 물이 말라 한자 정도 되는 깊이 속에 많은 잉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마침 밥을 주는 시간이어서인지 많은 잉어들이 몰려 드는   , 석주에는 또한  잉어가 조각되어 있기도 하였는데  조각은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는 데....... 과연 정말일까?

 

옛날, 비쟌틴의 수도 비쟌티움의 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가 1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여  이제는  하나의 관광지가 되어서 옛사람들의 장인 정신과 과학적인 건축기법을 컴퓨터시대인 오늘날까지 뽑내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선조들이었다.

 

물을 저장하기 위한 저수지로서는 지나치게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지하궁전을 보고 나오니, 하늘은 어느새 말갛게 개여 있고, 우리는 이편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저수지 위로는 길이 있어 전차와 자동차들이 왕래하고 있으니 기초가 얼마나 튼튼하면….

대단한 물탱크였다. 요즈음 하이웨이를 운전하다 보면 가끔씩 보이는 커더란 물탱크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메두사: 고르고라는 세 마녀들 중의 하나로, 고르고 메두사라고도 한다.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네의 신전(神殿)에서 해신(海神) 포세이돈

 

과 정을 통했다고 하여, 아테나 여신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 그녀

 

가 영웅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린 때,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天馬)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괴물로 나오며

 

그녀는 고르곤의 3마녀 중에 하나로 '고르곤 메두사'라고도 한다.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녀의 왼쪽 혈관에서 흐른 피로 인간을 죽이고,

 

른쪽 혈관의 피로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고, 리비아 사막에 떨어진 핏방울은 독사로

 

변하게 했다. 본래 메두사는 대지여신(大地女神)으로, 고르곤은 마귀를 쫓는 호부

 

(護符)였는데, 고르곤으로서의 메두사가 되었다고 한다.

 

 

 

 

히포드롬 (Hippodrome)

지하궁전을 보고 나와 이스탄불의 다방에로 들어갔다.

비행기 안에서 아침이 아침 같지가 않았지만, 아직 점심을 먹기는 이르고…..

분위기가 1970년대 서울의 고급 다방 같으다.

푹신한 소파 의자에 천정에는 수많은 오색 등이 걸려 있는 장식과 벽에 걸어 놓은 사진과 그림들…..

음악만 당시에 즐겨 듣던 베토벤이나 쇼팽이 나오면 영락없는 서울인데

이곳 특산 차와 과자 몇개로  달래고 지척의 거리에 있는 히포드롬으로 갔다.

 

말들의 경주장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은 히포드롬,

본래 이곳은 196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 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단다.

 

4만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단다.                                  

13세기 십자군의 침입으로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수난을 이겨내고 아직까지도 똑바로 있는 개의 기념비 또한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지금 까지도 가장 보존되어 있는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기원전 149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룩소 사원에 세워졌었던 개의 오벨리스크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탑이다.

탑이  서기 4세기에 로마황제의 명령으로 지중해를 건너 곳에 오게 것이다.

돌덩어리를 어떻게 움직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이루어 졌던 것이다.

데오도시우스 1   로마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양과  전차 경기를 보고 있는 왕족들의 모습,  전차 경기의 모습들이 부조된 받침대 위에 올라 아직까지도 꼿꼿히서서 관광객들을 마지하고 있는 것이다.  1700 동안이나…..

 

조금 떨어 곳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것은 델피에 있었던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미터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머리가 잘려 나가고, 몸통만 남아 있어 그게 과연 세마리인지, 두마리인지 없이 서로 꼬고 있는 부서진 기둥에 지나지 안았다.

머리는 과연 지금 어디에 있을까?

황금 그릇은….?

 

디킬리타스라고 불리우는 오벨리스크와 오메르수툰 직선을 이루는 거리에 다른 하나의 커다란 탑이 있었다.

돌들을 쌓아 올린, 디킬리타스와 거의 같은 높이의 탑인데 언제 만들어 졌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허나 중간, 중간에  떨어져 나간 돌들이 있었는데 자리는 십자군전쟁 탑을 장식하고 있던 청동판들을 모두 약탈해 상처라고 한다.

과연 어떤 청동판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탑을 쌓을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테인데…..

많은 상차를 입었지만  아직까지 건재하게 있는 탑을 돌아 바로 옆에 있는 불루 모스크로 들어 갔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있기에 곳에는 오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토프카프 궁전으로 향하였다.

 

토프카프궁전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살던 곳이다.                                        화려한 돌마바흐체 궁전은 오스만제국 말기에 잠시 쓰였던 왕궁이고,

진짜 왕궁으로 오래 쓰인 바로 이곳 토프카 궁전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경치 좋은 곳에 세워져있었다.

건물의 사치스러움은 돌마바흐체만 못했지만 네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내실에 이를 있는 웅장한 멋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옛날의 영화의 잔재를 유리관 속에 진열하고 있지만…..

 

도자기 전시관과 의상 전시실을 거쳐 보석 전시관을 둘러 보았다.

그대로 옛날의 실크로드의 끝자락 답게 중국 도자기도 많이 전시가 되어 있었고, 옛날에 왕들이 입었던 비단 옷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사람들이 컷을까?  목의 굵기는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데….

 

보석 전시관에 들어가니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다이아몬드가 전시되어 있다.

스푼 메이커스라는 이름이 붙은 86캐럿이라나?  

우리 손녀 주먹보다도 다이아를 목에 걸고 다니던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       어떤 팔자를 타고 났었나?

드려다 보아도 그림 속의 떡인 다이아몬드지만 여성들의 호기심은 앞에 한참을 서있게 만들어 주었다.

왕이 앉았던 화려한 의자, 마호멧이 가지고 다녔었다는 , 모두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하기 그지 없는 보물들이었다.

과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들끓는 곳에 진짜를 전시하였을까?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세례요한의 팔이라고 하는 유골도 장식으로 만들어진 모양 안에서 말라 미이라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다른 모퉁이에는 모세의 지팡이도 전시되어 있었다.

모세, 세례 요한, 이삭, 이스마엘,

뿌리에서 나와 가지가 서로 틀리기에 하나는 기독교가 되고 하나는 이슬람이 되어 서로가 천년이 넘께 싸우며 으르렁 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 수가 있을까?

하나는 적자요 하나는 서자이기 때문에….?

 

서자들의 후손이 전시한 전시관을 나서는 나에게는  그게 과연…..?! 하는 의문이 뿐이었다.  전시물이 기독교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지만…..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화려하게 치장된 유물들이 놀라웁기에   믿을 수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엄청난 규모의 토프카프 궁전이요,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보석 전시장이요,

믿기 힘든 역사박물관이 토프카프 궁전은 보스포라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한 70 평방미터에 이르는 궁전으로, 1453, 오토만 제국의 술탄인 메흐멧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게 되면서 처음 건설되어 그후 4세기 동안 꾸준히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결과 오늘날 곳은 15세기-19세기 초까지의 오토만 건축양식의 변화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때 곳에는 술탄과 가족 외에도 5만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옛날 요리를 만들었던 곳은 지금은 도자기 박물관이 되었고,

 보물고에서는 술탄 군왕들이 사용했던 옥좌, 면류관, 무기, 생활용구, 왕비나 여자들이 사용했던 장신구가 전시된 것은 보았으나,  터어키 각지에서 미녀를 모집했던 할무, 신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남자) 방도 보존되어 있어 흥미를 더한다지만 우린 이제 주린 배를 채우러 궁전 안에 있는 현대식 식당으로 들어 갔다.

식욕이 조금 앞서는 욕망이 아닌가ㅋㅋㅋ

메뉴판에 적혀있는 음식값이 장난이 아니다. 허허….

그래도 우린 먹는다. 돈을 내는게 아니니까…..

왜냐하면 우린 지금은 왕와 왕비들이 되었으니까 계산은 하인들이 하겠지ㅎㅎㅎ

 

점심을 먹고, 이제 다음 장소로 가야 하는 자그마한 문제가 생겼다.

오늘 새벽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잠도 설친 데에다가 이제 여행도 거의 막바지에 도달하고보니 모두들 너무 지쳐 있는데 아직도 것은 많지…..

가이드가 곤혹스러워 한다.

우리 일행들도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이젠 호텔로 가서 쉬자는 사람으로 의견이 갈리고…. 허허, 난감이란 이럴 쓰는 말이 아니겠는가.

일단 호텔로 돌아 가기로 하였다.

호텔이 멀지 않으니 짐을 나오고 싶은 사람은 다시 나오기로 하고…..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메드 모스크)

 

4시에 나갈 사람들은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단은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몸은 물먹은 같이 무겁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못보고 가면 안될 불루모스크가 있기에 4시에 로비로 내려오니 14명이 모였다.

최00씨가 인솔하기로 하고 걸어서 불루모스크로 향하였다.

다행히 아직 기도시간은 안되었고, 아침처럼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금방 들어 수가 있었다.

들어가려는데 비닐 백을 하나씩 주면서 신발을 벗으란다.

시내산도 아닌데 신발을 벗지…..? 

허나 실내를깨끗하게하기위해서, 아니 이네들은 사원에 들어가기위해서 발을 씻기도하는데 벗는 것 쯤이야….

그래서 그렇게많은 수도꼭지가 아래에 있지않았는가……세족을위해서.

 

입구로 들어 서는 순간 벌어지는입은 닫을 수가없도록 그 내부는 웅장하고 화려했다.

책에서 본대로 지름이 5미터가 넘는 기둥에 받혀 높이 지어 ,

마침 석양을 받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에 파랗게 빛나는 푸른 타일들의 군무!

엄청난 규모의 사원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술탄 아흐멧 사원이라고 하며  터키 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인 사원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블루모스크가 특이한 것은 첨탑이 6개라는 .

바로 앞에 건너 마주하고 있는 아야 소피아( 소피아)” 능가하는 모스크를 지으려 했으나, 막상 지어놓으니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술탄은 메카 순례를 떠나며 신하들에게 금으로 첨탑을 세우라 명했단다.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 금으로 첨탑을 세우라는 명을 받은 그들은 왕이 “alten() 아니라 alte(여섯) 첨탑을 세우라 했다 하자고 입을 맞추어 6개의 첨탑을 세웠다.

순례에서 돌아온 술탄이 보니 첨탑이 금이 아닌 것도 문제지만 메카에만 첨탑이 6개여야 하는데 이곳이 6개이니 문제였다.

그래서 첨탑을 하나 만들어 메카에 기증하여 메카와의 문제를 잠재웠단다.

그래서 오늘도 메카의 모스크에는 첨탑이 7개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중앙의 주위로 사방에 반돔형이 있다.

채광과 온도조절을 위해 만들어진 창문은 돔의 것을 포함해 무려 260여개나 된다.

뜰때부터 질때까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줄기 줄기마다 기둥을 이루며  빛기둥이 쏟아지는 모스크 안에 청람색의 타일이 21,043개나 있어 무어라 말할 없이 아름답다. (누가 타일의 숫자까지 세었을까…?나야 슬쩍 빌려 왔지만)

이러한 이유로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불루 모스크라고도 불린다.

 

모스크의 건축은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건축가, 특히 많은 돔을 건축에 이용한 시난의 제자였던  아아에 의해 1609 착공되고 1616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모스크가 그렇듯이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도 신학교, 병원, 아라스타 시장, 왕능, 대상들의 숙소, 학교 그리고 대중 우물이 있는 복합건물이다.

 

중앙의 돔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아치들과 받침의 각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앙 돔의 높이는 43m이며, 직경은 23.5m.

코끼리 발이라고 부르는 직경 5m 달하는 거대한 기둥이 중앙의 돔과 단대공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부분을 떠받치고 있다.

모스크의 내부 장식을 위해 사용된 타일은 물론 바닥에 실크 카피트는 당대 최고의 작품이었고, 조명을 위해 사용된 수백개의 크리스탈 오일램프는 외국에서 수입되었다고 한다.

거의 정사각형으로 본당의 규모는 51×53m 달한다.

 

모스크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된 타일의 디자인은 , 나뭇잎, 꽃받침, 튤립, 장미, 히야신스, 카네이션포도 그리고 기하학적 모양들이다.

또한 모스크에는 아랍문자의 장식이 있다.

세계의 문자 문양을 만들수 있는 안되는 문자중의 하나가 아랍문자라고 한다.

코란의 구절들을 인용한 문양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술타 아흐메드 모스크의 경건함에 어울리는 문양은 디야르바르크 출신의 세이드 카슴 부바르라고 불리는 터키 서예가의 작품이다.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하는 종교로 어떠한 조형물이나 그림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야소피아와 달리 모스크 내에는 무늬만 있을 종교적인 그림은 전혀 없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만이 있을 뿐이다.

터키 특제품인 카펫 위에 앉아 높은 천정을 바라 보며

옛날에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달래다가 밖으나 나왔다.      이네들의 기도 시간이 되었단다.

아직도 옛날에 어떻게….” 하며 감탄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요즈음에다 너무나 많은 수를 주는 요즈음의 사람인 모양이다.

옛날에도 요즈음 보다 훨씬 장인 정신이 강하고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았는데 말이다.

허기사 요즈음 지은 건물이 어디 이렇게 1000년을 버티겠는가?

아직도 저녁해는 지기가 멀은 같아 해변으로, 아니 내일 배를 타고 유람할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내려가 보았다.

꼬불 꼬불한 골목길은 언제 깔아 놓은 모를 돌로 길이었고, 주변의 집들은 새로 단장한 집에서부터 고색 창연한 고가옥이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좁을 길을 비집고 들어 오는 현대 마크가 선명한 자동자들.

돌고 돌아 언덕을 내려 가니 바닷가다. 

아니 분주히 배들이 오가는 보스포러스 해협이다. 

저녁해에 바라보는 바닷가의 정취는 맛을 사람은 수가 없겠지.

맛을 어찌 설명할 수가 있으리…..

기분에 취해서 송장로님이 한방 쏘시겠단다.

쏜다면  좋와하는 우리들ㅎㅎㅎ

청포도 넝쿨이 주렁주렁 달린 야와 카페로 들어가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시원한….음료!

또한 일품이었겠지…..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맛을 모르겠지만ㅋㅋㅋ

 

이맛 저맛 보고  저녁 후에 지난 두주간을 돌아 보며 서로가 느낀 감회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 한지가 오래 되어서였을까….?

지나온  여행에서 느낀 감정과 감회가 거의 비슷하였다.

허기사 같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감회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는가….

놀램과 경외의현능력 또한 비슷할 밖에….

왜냐하면 정상은 점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보아 것들은 모두가 정상에 있었으니까.

이제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여러 종족이 거쳐 지나 갔던 길이기에 이제는 다시 여러 종족에게로 선교할 있는 지름길이 되어 터키. 그러나 지금은 선교의 불모지에 다름이 없다.

언제인가 옛날에는 기독교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이슬람이 모든 사람들을 사로 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작을 불씨를 이르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의 길에 주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보스포러스 해협

터키에서의 마지막 아침이다.

짐들을 꾸려 버스에 싣고 선착장으로 갔다.

그 유명한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하러 가는 길이다.

보스포러스, 소가 헤염 쳐서 건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왜일까?

 

옛날 옛날 옛날에 소가 건넜기 때문에 보스포러스라고 이름지어 졌다.

그럼 소는 어떤 소인가?

제우스까지 들먹거려야 정도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늘의 제우스는 땅의 물의 신인 이나코스의 딸인 이오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신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하늘의 여왕인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가 왠지 이상해 지기 시작하는 남편 제우스의 뒤를 밟게 되었다.

여신 이지만 여자이기에, 여자의 직감(? )으로 이걸 눈치채고 제우스의 뒤를 밟았단 말이다.

제우스 신이 아닌가?

미행을 눈치 채고 사랑하던  이오를 잽싸게 송아지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나타난 헤라가 제우스에게 송아지를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자 제우스는 난감하여졌다.

못주겠다고 하면 들통이 것같아 결국 승락을 하고 말지 않았는가….

허허, 믿을 남자의 사랑인가 하노라. 아니 남자가 아니라 남신이다.

쪼금 책임감이 약한 제우스인 모양이다.

지가 연애 했으면 지가 책임 일이지

 

신이라고 해도 여신에게는 그때부터 질투가 있었나보지?

헤라는 송아지로 변한 이오를 백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맡기고 엄중 감시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소가 이오는 자기를 구해 달라고 애를 섰지만 소로 후라 말이 안통하여 방법이 없던 차에 발로 글을 써서  아버지 이나코스에게 보여 주자 눈 앞의 소가   자기가 그렇게 찿 다니던 딸임을  알게 되었지만 땅에 있는 물의 신의 능력으로는 속수 무책, 오히려 모르고 있을 때보다 괴로워 하게 되자, 하늘에서 모양을 제우스는 점점 괴로워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헤르메스를 불러 아르고스를 죽이라고 명령을 하였다.

 

헤르메스는 날개 돋친 신을 신고, 머리에는모자를 쓰고 잠이 오게하는 지팡이를 짚고 천상의 탑에서 지상으로 뛰어 내렸다.

여차여차하여( 쓰자면 지루할 테니가…)아르고스를 죽이고 이오를 석방하게 되었다.

 

이를 헤라는  더욱 복수심이 불타올라 죽은 아르고스의 눈을  자기 자신이 기르는 공작의 꼬리 장식으로 달아 놓고,  이오에게는 더욱 괴로움을 주기 위해서 소의 피를 빨아 먹는 등에를 한마리 보내었다.(다음에 공작을 때는   활짝 꼬리를 보시라.)

 

이오는 등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을 돌아 다녔다.

이태리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헤엄쳐 건넜기에 바다 이름이 이오니안 해가 되었고, 일리리아의 들을 방황하다가 트라키아 해협을 횡단하게 되었다.

트라키아 해협이 때부터 보스포러스 해협이라고 불리우게 것이다.

 

이상 이오의 불행을 지켜볼 수가 없었던 제우스는 부인인 헤라에게 이제는 다시는 만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헤라의 질투를 풀어 주어, 이오로 하여금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니까….

이런 유래를 가지고 지금도 동양과 서양을 가로 지르는 해협, 보스포러스.해협.

 

서양에 있는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이스탄불을 가로 질러 흐르는 해협이다.

해협의 윗부분은 흑해애서 마마라(Sea of Marmara) 흐르고 밑에서는 마마라에서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묘한 해협이다.

두주간에 걸친 여행의 마지막날, 터키에서의 마지막 날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으로 시작 되었다.

우리만을 위해서 전세 내어 배를 타고 보스포러스 대교를 지나서 새로 만든 다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에 해변으로 보이는 수많은 별장들과 유적들.

모두들 순간 순간 변하는 해변의 모습을 보노라 정신이 없는 같다.

우리는 이렇게 한가하게 뱃전에서 풍광을 구경하고 있지만 우리가 배를 띄워주고 있는 해협의 물살은 무척 세어서 윗물길은 말마라 바다에서 흑해로 흐르지만 아랫물길은 꺼꾸로 흑해에서 말마라바다로 흘러 들어가기에  여간 사나운 뱃길이 아니란다. 위를 여유롭게 날라 다니다 가끔씩 잠수하여 고기를 물고 올라오는  갈매기는 속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개의 대교가 있다.

번째 다리의 이름은 '보스포러스 대교'이다. 터키 공화국 창건 50주년에 맞추어 1973년에 개통되었다는 다리로, 영국과 프랑스의 기술로 건설된 총길이 1,560m, 교각 거리가 1074m 다리다                                                                                      

 

번째 다리는 '파티흐 술탄 메흐메드 대교' 정복자 메흐메드 황제의 다리라는 뜻이다. 아타튀르크 다리라고도 한다. 1988 일본의 기술로 여름에 개통되었는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현수교이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의 양단에 세워진 교각 거리는 1090m이고 중앙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64m이다.   

이들 다리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고가는 엄청난 교통량을 소화하고 있다

다리 밑으로는 매년 5 척이 넘는 선박들(화물선, 대규모 탱커, 크루즈 선박들)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다리 밑으로 대형 선박이 많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교각을 세울 수가 없어서 현수교로 만들어졌단다.

 

동양과 서양을 옆으로 보면서 동양과 서양을 이어 주는 두개의 다리 사이를 갔다 왔으니 우린 아침 나절에 두개의 대륙을 섭렵한 셈이 되었나…? 허허허

어언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랫만에 대하는 한국식당, 음식도 정갈하고 맛도 일품이었고, 푸짐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터키에서의 마지막 만찬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랜드 바자

점심 후 그 유명한 그랜드 바자로 갔다.

한마디로 와!!!!!!

엄청 큰 시장이다.

한시간의 자유 시간을 주면서 구경하고 오란다.

몇사람씩 짝을 지어 다니다가 거기서도 또 서로의 다른 취향으로 골목길에서 헤어지는가 하더니 또 다시 만나게 되고….. 미로 미로마다에 차고 넘치는 상품들…..

그네들의 상술, 팔기 위한 전략 또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질 좋은 가죽 제품들이 있어 가격을 물어보니  우리가 들렸던 가죽 공장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 그네들의 집요한 설득과 내심 좀 씁스름한 느낌에 맘에 드는 자켓을 하나 입어 보았더니 결국은 내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 남의 돈을 빌려가면서 말이다. 허허허

외상이면 황소도 잡아 먹는 다는 우리의 속담 때문이었나? 아니면 값이 너무 좋와서였나…? 

 

 

성 소피아 교회

 

이제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방문지 성 소피아 성당으로 갔다.

현지어로는 아야소피아. 유럽인들은 하기아 소피아, 그리고 우리는 소피아 성당이라고 부르는 엄청나게 큰 교회다.

비쟌틴 시대에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지어 졌으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오스만 터키 시대에는 회교 사원으로 사용되기 위하여 그 마당에 4개의 첨탑이 세워지며 많은 성화들이 회 속에 감추어 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복원되어지고 있는  그 내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엄청난 건물이다.

1500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비록 회옷을 덧입기는 하였으나 건물 자체로서의 결함없이 지탱해 올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어진 교회를 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은 감탄과 놀람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1500년 전에 이런 건물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아직까지도 그 많은 지진을 견뎌내며 건재할 수가 있었을까?

우리의 지식과 상식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 현실 속에 우리가 들어 와 있는 것이다.

 

우리 말로 성 소피아 대성당이라 부르는데, 마치 소피아라는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 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소피아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한다. 따라서 제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지혜의 대성당'이 되어야 맞다고 한다.

 

이 자리에 첫 번째 세운 건물은 AD 390년에 지어졌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이 되는 것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인부는 기술자만도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었단다.

그래서 이 교회는 5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 12 27일 완공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선전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에베소의 성 요한 기념교회에서 멀리 있는 아데미 신전에 남은 하나의 기둥을 망원경을 통하여 보았기에 지금 여기서 그 실물을 보며 공상을 해 보지만 사실 감이 잘 잡히지가 않았다.

그 옛날,에베소에서 바울을 쫒겨가게 만든 그 아데미 신전의 기둥이 지금은 그 당시 세계 최대의 교회 기둥으로 사용되며, 그 기둥이 받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읽었을 테이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단다.

이렇게 지어진 교회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하였기에 황제가 개장식에서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역사가 바뀜에 따라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다.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메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될 때에는 횟가루로 덛칠이 되기도 하였었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 (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오늘날에도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교회의 면적은 총 7,570m²로,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 성당이 지어질 때까지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나중에 개조하여 붙여진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단다.

 

교회가 지어 졌을 때 여왕이 예배드리러 오면서 타고 온 마차가 올라 갈 수 있도록 층계 대신에 경사진 길로 오를 수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을 지나게 된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보게 된다.

순 금으로 만들어 진 모자이크의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 쪽에는 세례요한이란다

그리고 벽 윗부분 동그란 판에 금박으로 새겨진 아랍문자는 알라와 모하메드의 이름이란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오묘한 조화... 허기사 뿌리는 한 뿌리인 것을…..

 

이 모자이크의 맞은편에는 제4차 십자군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 십자군의 사령관 단돌로의 무덤이 있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이슬람에 점령당한 성지를, 교회를,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결국은 많은 교회의 성물들을 파괴하고 잃어 버리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때 승리를 자축하던 그 장군이 누워 있는 교회가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신이 아직도 그 교회에 안치되어 있을 수 있다는…….

참 알다가도 모를게 역사인것 같다.

 

북쪽 방향의 본당 벽에도 요한 크리소스톰과 익나티우스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프래스코가 그려져 있었다.

 

화려하였으나 지금은 그 화려함을 되찾기 위한 복원작업을 위해 오히려 벌거 벗겨져 철골로 버티고 선 중앙 천정, 웅장한 그 건물 속에서 예배 드리고 찬양하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웅장하고 크게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이 전 안으로 끌어 드릴 수가 있을까?

무소부재하고 그 크기가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올 수 있도록 작아지기도 하지만 또한 온 우주를 끌어 안을 수 있도록 크신 그 하나님을 위한 집은 과연 얼마만큼 커야 할까?

결국 우리의 욕심만큼이요 우리의 능력만큼이 되는 것이 아닐까?

 

감탄 속에 흐르는 시간은 빨리 지나 이젠 비행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4시까지 비행장에 가야 6시발 파리 행 비행기를 타고, 그래야 우리가 두고 온 집으로 갈 수가 있으니까.

놀램과 감탄의 연속으로 이어진 그리스와 터키의 여행이 이제 막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집으로 오는 길

그동안 우리와 함께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케말과 최세현 선생과의 이별 시간이 되었다.

비행장에서 손에 손을 잡으며 잘 있으시라고, 잘 가시라고  인사하는 우리들의 심령에는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비록 잠시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던 잠시이기에 그 정은 더 깊어 졌으리라.

언제가 될지는 서로가 알수 없어도 재회를 기약하며 흔드는 손길을 뒤로하고 세관을 통과하여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우리 끼리 뿐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가…?를 궁리하며 기다리는 시간조차 과히 지루하지는 않았었다.

혹시…. 함께 파리의 야경을 구경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금씩은 다 있었으니까.

파리까지는 제 시간에 제대로 도착을 하여 아직도 훤 할 때 비행장을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를 태워 주러 버스가 나오는 줄 알 았엇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그래, 이젠 우리기리 뿐일 테니까…..

Shuttle버스를 타고 호텔로 가는 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바람에 파리에서의 야경을 날라가고….

그러자 갑작이 업습하는 피로감에 모두들 더 지쳐 보인다.

그래, 이젠 자야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집으로, 우리들의 교회로 건강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돌아 가려면 이젠 자면서 피로를 풀어야 할까보다.

파리의 야경은 꿈 속에서 보기로 하고….

 

오늘까지 이 여로에 함께 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다 함께 한 마음으로 움직이며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우리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자 이제 다음에는 어디로 가지?  언제?

때가 되면 아르켜 주시겠지.

주님 감사합니다.

2008 5월 순례를 마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