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chunchunhi 2008. 10. 7. 11:44

 

 기대치06.03.25 

 

2006년 3월 25일 구역예배: 본문 빌립보서 2장 5-12
지난 구역예배에서는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은? 무었인가? 그리고 이 모두를 합쳐  삼위일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읍니다.
오늘은 사순절 중에 본문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죽으셨다고 하였는데 왜 죽으셨는가?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나요?
우리 죄를 대속하시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해서? 기타 대답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데 그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었일까요?

혹시 하나님이 죽어야만 하게끔  만드시지 않았을까요?
마치 작가가 책에서, 영화에서처럼 주인공을 설정 할 때 처럼 미리 계획되어진 수순이었나요?.
애초에 아담과 이브를 만들 때부터 계획하셨던 일일까요?

그럼 하나님은 왜 죽도록 놔 두셔야 했을까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스스로가 주위의 환경에 의해서, 아니면 자신도 감당 못할 자신의 마음 때문에  자꾸 변해가니  하나님도 그 변화를 예측 못하셨을까요?

애초에 가인이 아벨을 죽이도록 만드시지는 않았을텐데…
노아의 홍수를 미리 준비하고 인간을 만드시지는 않았을 텐데…

부활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죽음의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하시려고 그러셨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직접적인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 때문에 죽이기로 작정하였고, ,빌라도도 결국은 그 이유 때문에 놓아 줄 수가 없었던 것 아니예요?

대 제사장은 질투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왜 바나바를 외쳤을가요?

불과 며칠 전 만 해도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던 인파가 왜 갑작이 예수님 대신에  바나바를 살리라고  외친 데에는 예수님에게 걸었던 그 기대에서 온 실망감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떡 다섯 덩이와 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물 위로 걸어다니시고, 바람을 꾸짖에 풍랑을 잠잠께 하시는 능력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믿기 시작하며 그네들이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던 기대치는 왕으로 군림하셔서 로마의 압박을 풀고,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지상 낙원을 기대하였기에 죽으시기 불과 며칠 전에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보좌의 좌우에 앉혀 달라고 로비까지 하지 않았던가요?
이것이 그 때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던 기대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져야만 한다고 가르치며 힘없이 끌려가 고초를 당하셨으니 그 기대치가 허물어졌던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가 생겼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는 제자들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예수님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치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 복음서를 읽으시면서 어떤 대목을 제일 좋와 하십니까?
예수님의 어떤 면이 제일 가슴에 와 닿습니까?

네,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들이 좋와 하는 대목, 가슴에 와 닿는 일들을 보면 결국은 그게 여러분들이 예수님에게 걸고 있는 기대치인 것입니다.

좋은 직장이나 일터를 주시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를 들어주기 원하는 기대치?

자녀들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잘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것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기대치?
육신의 질병이 빨리 낳게 해 달라는 기대치?
마음의 평안을 달라는 기대치?
어떤 사람은 649이 맞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도 하더군요.

이런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린 어떻게 하지요?
내 기도가 부족했다고 생각하나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나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기는 계신가 하고 의심을 하기 시작하나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거는 기대치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결정 될 것 같읍니다.

그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진 기대치는 무었일까요?
대상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읍니다.
부자 청년에게 가진 예수님의 기대치는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고,

니고데모에게 가진 기대치는

상식과 지식의 관념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으며,

사랑하는 12제자에게 가진 기대치는

깨어 기도하기를 바라셨으며,

수 많은 무리에게 가진 기대치는

믿고 따르라는 것이었던것 같읍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가능한 것에 대한 기대였다는 말이지요.

가난한 어부들에게 재산을 팔아서 나누어 주라 안 하셨고,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에게 순결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지만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 후에는 세상에 나가 병도 고치고 복음도 전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앉은 우리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무었일까요?
우리의 능력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만큼 일까요?
구역장인 내게 바라는 기대치, 순장에게 바라는 기대치, 우리 구역원 모두에게 바라는 기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기대치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읍니다.
부부지간에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고,

친구지간에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고

부모와 자식간에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고,

교회에서, 목사님에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고,

사회에서 정치가에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있는데

그 기대치에 따라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할미, 할미” 하며 부르던 손자가 어느날 할머니 하고 부르면 대견해 하지요?
분명히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말을 할거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그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였던 것보다 조금 빨리 오면 대견해 하고 기뻐 합니다.
똑 같은 “할머니” 라는 말을 만약 제가 한다면 그 눈이 옆으로 조금 찢어지겠지요?

밥을 먹고는 신문만 보던 남편이 어느날 갑작이 설것이를 해 주던지. 무뚝뚝한 남편이 꽃 한송이를 사 들고 들어오면 이 또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기에 기뻐하는 여자들이기도 하지만, 그 여자분들이 남편에게 거는 기대가 Tiger Wood처럼 Golf도 잘 치고 돈도 잘 벌고 하기를 기대하는데 Golf는 거저 매일 100을 넘나들지요, 돈은 겨우 먹고 살기에 빠듯하지요 하면 후회 막급이요 짜증이 나겠지요?
아니 Tiger Wood야 워낙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비교를 하지 않는다 해도 내 남편보다는 조금 더 낳게 보이는(이건 상상으로 낳게 보이는 것이지 살아보고서 나온 느낌이 아닙니다. 살아 보았다가는 큰 일이 나지요.) 이웃의 남편과 비교하면서,  바가지를 긁어도 허허 웃으며 도닥거려 주기를 기대하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 눈빛을 보고 척척 알아서 비위를 맞춰 주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실망하지요?

내가 왜 이런 남자하고 사나 하고 말이예요.
남자들 또한 마찬가지지요.
이렇듯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은 우리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기대치를 기준으로하여 저울질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국 야구가 4강에만 올랐으면…. 하는 기대치가 이루어 졌을 때엔 모두가 환호하고 기뻐하다가도 그 기대치를 우승으로 상향조정하다보니 허탈감이 생겨났듯이 말입니다.
하나를 이루고 났을 때 조금 더 바라는 욕심, 인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욕심이 문제지요.
욕심은 왜 생길까요?
내가 남보다 조금 더 낳게 되기 위해서 생기지요.
나를 낮추다 보면 욕심이 생길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면 발전이 없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앙앙불락하며 발전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있는 대로 만족하며 마음에 평안을 원하시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 “그는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었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스스로 낯추는 삶의 극치라 하겠읍니다.
우리도 우리 스스로 낮아지고, 기대치를 낯게 가지다 보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던지 즐거운 마음이 되고 기쁜 마음이 될 수가 있겠지요.
높아지려 할 때 친구간에 거리가 생기고, 사회에서 불의가 횡행하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부부싸움, 형제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책정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다보니 서로 상충되어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의 기간 동안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기에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내가 우리 주님에게 가진 기대치가 무엇인가를 점검하고, 또 주님이 나에게 가진 기대치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나를 조율할 수 있는 귀한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구역원이 되고, 온누리 교인이 되어 이 세상을 살 때 평안을 느끼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령의 띠로 묶인 교우들이 되어지기를  기도 드립니다